brunch

서브 팝

by 김성대


조나단 폰맨은 처음부터 우릴 진심으로 지지해 주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길 원했다.

커트 코베인


우리 작전 중 하나는 서브 팝이 서부 해안에서 엄청난 거물이라는 것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걸 믿었다. 가령 컴필레이션 《Sub Pop 200》에 실은 건물 사진에 쓴 ‘서브 팝 본사’에 사람들은 “와, 서브 팝은 11층짜리 사무실 건물을 갖고 있구나!” 생각하는 식이었다.

브루스 파빗

"서브 팝의 주요 전략은 레이블을 과대 포장하는 것이었다." - 크리스 에크맨(Chris Eckman, The Walkabouts), 사진=《Sub Pop 200》 속지.


1980년대 중반 미국엔 톰 페티Tom Petty, 존 멜런캠프John Cougar Mellencamp 같은 아티스트들이 대표한 하트랜드 록Heartland Rock의 마케팅에 따라 로커가 성공하려면 LA나 뉴욕으로 가야 한다는 통념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해당 음악가들의 매출이 떨어지면서 통념은 무너졌고, 업계는 록이 위기에 처한 것으로 여겼다. 『롤링 스톤』은 그 이유를 헤비메탈, 알앤비, 댄스 음악의 부상에서 찾았다. 레이블 서브 팝은 이런 분위기에서 등장했다.


너바나처럼 서브 팝 공동 설립자 브루스 파빗도 올림피아에서 시애틀로 스며들었다. 조나단 폰맨과 함께 서브 팝을 설립한 브루스는 시카고 출신으로, 그가 올림피아로 거처를 옮긴 건 1979년이었다. 브루스는 그곳에서 『OP』라는 팬진에 미국 인디 록에 관한 칼럼을 썼다.


나는 모든 소규모 레이블과 팬진, 음반 가게에 『OP』를 배포하고 싶었다. 모두가 볼 수 있길 바랐다. 그게 내 비전이었다.

존 포스터John Foster


브루스가 글을 기고한 『OP』는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발행한 팬진이다. 올림피아 에버그린 주립대학 라디오 방송국KAOS-FM의 음악 사서이자 프로그램 감독이었던 존 포스터가 공동 창간하고 편집을 맡았다. 알파벳에 맞춰 총 26호까지 발행한 『OP』는 로스트 뮤직 네트워크Lost Music Network라는 학생 단체에서 태어나 거의 모든 인디 음악과 라디오, DIY 및 카세트 문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컨대 G호에선 포틀랜드의 여성 펑크 밴드 네오 보이스Neo Boys와 실험적인 뮤지션 게리 윌슨Gary Wilson, 인도네시아의 가믈란Gamelan과 가스펠 등을 다룬 식이다. 존 포스터는 KAOS에서 트는 음악의 80%는 인디 음악으로, 나머지 20%는 메이저 레이블 음악으로 채우는 이른바 ‘녹색 선 정책Green Line Policy’을 펼쳤다. 인디 음반엔 녹색 선을 그어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한 데서 붙인 이름이다. 방송과 인쇄물로 전파한 존의 정책은 결국 올림피아 음악계의 표준이 되어 미국 전역 수많은 라디오 방송국, 레이블, 음악가, 팬들 사이에 반향을 일으켰다.


메이저 대신 인디 음악과 라디오, DIY 및 카세트 문화에 초점을 맞춘 팬진 『OP』. 브루스 파빗이 여기에 글을 기고했다.


당시 사람들은 펑크와 뉴웨이브 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펑크 록 밴드 엑스(X)와 와이퍼스, 데드 케네디스, 어벤져스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음악들이 방송에 나갈 수 있었던 건 존 포스터 덕분이다. 존의 철학은 펑크가 곧 포크요, 펑크 록의 급진적 특징이란 누구나 음악을 발표하고 자신만의 앨범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KAOS가 지역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음악을 우선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좋은 정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브루스 파빗


존 포스터의 뜻에 공감한 브루스는 KAOS에 직접 들어가 서브터레니언 팝Subterranean Pop, 이하 서브 팝Sub Pop이라는 코너를 진행했다. 줄곧 올림피아에서 지낸 캘빈 존슨이 고3 때 1년간 비운 시기에 맡은 자리였다. 코너 이름은 급기야 팬진으로까지 진화하는데, 그간 완전히 무시돼온 북서부와 중서부 두 지역 음악에 초점을 맞춰 브루스가 창간한 것이다.

팬진 『서브 팝』은 1980~83년까지 브루스가 캘빈 존슨 등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도움을 받아 9호까지 만들었다. 3호까진 카세트테이프 형식으로 제작한 이 잡지는 우편을 통해 미국 전역에 있는 음악 팬, 음반 가게, 라디오 방송국에 뿌려졌다. 1983년 브루스는 올림피아에서 시애틀로 이사했고, '서브 팝'은 그곳에서 『더 로켓』의 칼럼이 됐다.

83년부터 88년까지 커트도 즐겨 읽은 『더 로켓』에서 브루스의 글은 인기 칼럼으로 자리 잡았다. 글을 빌려 북서부 음악 애호가가 되어야 하는 27가지 이유를 제시한 브루스는 87년 8월 9일, 조지타운 증기 발전소Georgetown Steam Plant에서 열린 빅 블랙의 마지막 콘서트를 보고 “빅 블랙의 조지타운 증기 발전소 콘서트는 역대 최고 공연이었다”는 스무 단어짜리 리뷰를 같은 매체에 싣기도 했다. 『서브 팝』 2호부터 브루스와 뜻을 같이 한 캘빈 존슨의 말이다. “80년대 팬진들이 엑스터시XTC, 갱 오브 포 같은 메이저 뉴웨이브 밴드에 집중할 때 브루스는 비커스The Beakers, 블랙아웃츠The Blackouts 등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밴드들에 관해 글을 썼어요. 정말 흥미로웠죠.”

1984년 7월, 브루스는 시애틀 터미널 세일즈 빌딩Terminal Sales Building에 14평 남짓의 음반 가게 폴아웃Fallout Records을 열었다. 이때 동업자는 조나단이 아닌 러스 바타글리아Russ Battaglia라는 인물로, 커트는 배츠The Bats의 1990년작 《The Law of Things》를 사러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자본금 20달러로 시작한 『서브 팝』은 레이블 서브 팝으로 거듭나 운영된 뒤 1995년, 워너 그룹(Warner Music Group)이 2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어둡고 강렬한 눈매를 가진 브루스는 머리까지 짧아 더 인상적이었다. 한동안 그는 피델 카스트로처럼 수염도 기르고 다녔다. 사람들에게 브루스가 실제보다 더 위협적으로 비친 반면, 존(조나단 폰맨)은 더 친근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질리언 G. 가르(작가, 음악학자)


레이블 서브 팝 설립을 위한 반쪽(조나단 폰맨)을 브루스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사운드가든의 킴 테일이다. 조나단은 시애틀 밴드 트리 클라이머스Tree Climbers의 베이시스트이자 라디오 DJ, 록 공연 기획자 출신이었다.브루스는 서브 팝 칼럼에서 트리 클라이머스를 칭찬한 적이 있다. “너희 둘과 함께 작업하고 싶어. 난 일리노이 주 파크 포레스트Park Forest에서 자랄 때부터 브루스를 알고 지냈어. 브루스와 함께 일할 생각 없어?” 1986년, 조나단은 확답 대신 사운드가든의 팬으로서 밴드가 앨범을 낼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킴에게 먼저 했다. 킴의 기억에 따르면 처음엔 조나단도 브루스도 서로가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조나단이 자신이 진행한 대학 라디오 방송국 KCMU 프로그램 오디오아시스Audioasis에서 브루스와 긴 대화를 나누며 상황은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게 빚을 지고 있던 브루스의 상황은 적금 15,000달러를 가지고 있던 조나단의 형편으로 상쇄됐다. 둘은 주위 사람들에게 4천 달러를 더 빌려 레이블 서브 팝을 세웠고, 창립 한 달 만에 그 돈을 다 썼다. 북서부판 스택스Stax 또는 모타운Motown을 꿈꾸었다는 조나단은 킴에게 했던 제안대로 “새로운 시애틀 사운드를 정의 내렸다”는 평가를 받은 사운드가든의 한정판 싱글 <Hunted Down>과 <Nothing to Say> 발매에 이어 EP 《Screaming Life》까지 제작하며 서브 팝의 미래를 밝혔다.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브루스와 나는 한마음이 됐다. 레이블 서브 팝에 집중하며 시애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자고 다짐했다."


1986년 브루스와 조나단은 컴필레이션 앨범 《Sub Pop 100》을 발매하며 사업 시동을 걸었다. 텍사스의 스크래치 애시드와 오리건 주의 와이퍼스, 뉴욕의 소닉 유스, 시카고의 네이키드 레이건Naked Raygun, 시애틀의 유-멘, 보스턴의 데인저러스 버즈, 밀워키의 보이 더트 카Boy Dirt Car, LA의 새비지 리퍼블릭Savage Republic, 일본의 쇼넨 나이프Shonen Knife 등이 참여한 앨범은 5천 장 정도가 나갔고, 그건 인디 시장에선 골드50만 장 판매고 급이었다. 이처럼 서브 팝은 시작부터 ‘전국적인 시각’으로 지역 신들 간 음악 교류를 노렸다.


서브 팝의 두 대표가 시애틀 신에 독특한 사운드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는 87년 그린 리버의 EP 《Dry as a Bone》을 내고부터다. 이를 기점으로 서브 팝은 이듬해 8월부터 89년 6월까지 분기마다 싱글, EP를 발매했는데 거기엔 사운드가든의 두 번째 미니앨범 《Fopp》를 비롯해 머드허니의 초기 싱글 <Touch Me I’m Sick>과 <You Got It>, 데뷔 EP 《Superfuzz Bigmuff》, 태드의 데뷔작 《God’s Balls》, 그리고 너바나의 <Love Buzz> 싱글이 포함됐다. 크리스 코넬의 회상이다. “1988년 무어Moore 공연장에서 브루스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나를 팔로 감싸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시애틀이 세계를 장악할 거야!’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을 보고 시애틀 록 신에 대한 비전을 가ㅈ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조나단은 사운드가든을 보며 주사위가 던져졌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운드가든은 전 세계를 장악할 밴드로 보였다.


조나단과 브루스의 천재적인 마케팅 전략은 로큰롤을 ‘반항’이라는 고대의 신조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덩치 크고 멍청한 록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이 힙스터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지Grunge 이전까지만 해도 대중음악에서 메이저와 언더그라운드의 경계는 뚜렷했다. 한쪽에는 저니, 다른 쪽엔 데드 케네디스. 서브 팝은 그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에버렛 트루


서브 팝이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레이블의 성공과 실패를 연구하고 이미 구축한 인프라를 잘 활용한 덕분이다.

마이클 아제라드


서브 팝에서 브루스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었고 조나단은 ‘실무 담당자’였다. 아제라드의 진단처럼 기존 인디 레이블들의 성공과 실패를 이 잡듯 연구한 둘의 강점은 홍보였다. 영 프레시 펠로우스Young Fresh Fellows를 보유한 팝라마PopLlama Records도 같은 쪽에 일가견이 있었으나 서브 팝을 넘어서진 못했다. 비결은 언론이었다. 자신도 매체에 글을 썼던 파빗은 대중음악 언론에 음악가를 노출시켜 회사를 키우려 했다.


1989년 3월 19일 『멜로디 메이커』에 실린 ‘서브 팝 시애틀: 록 시티’ 기사. 에버렛 트루는 서브 팝의 초빙으로 시애틀에 2주를 머물며 기사 내용을 취재했다.


단, 미국 미디어만으론 부족했다. 브루스와 조나단은 영국 언론을 물색했다. 두 사람은 지미 헨드릭스와 블론디Blondie가 미국보다 영국에서 먼저 인기를 얻은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멜로디 메이커』 기자와 사진작가를 머드허니에게 소개해 주면 어떨까요?” 서브 팝 영국 홍보 담당자 안톤 브룩스가 의견을 냈다. 그 대가로 머드허니가 잡지 커버를 장식하고, 기사에 서브 팝 이야기까지 곁들이자는 전략이었다. 최초 안톤은 록 취향으로 보였던 『멜로디 메이커』의 스타 필자 스터드 브라더스The Stud Brothers를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던 저들을 부르기에 서브 팝 쪽 예산은 빠듯했다. 안톤은 결국 그린 리버에 푹 빠져 있던 같은 잡지의 다른 필자 에버렛 트루에게 《서브 팝 200》, 머드허니와 소닉 유스의 12인치 스플릿 싱글, 너바나의 <Love Buzz> 싱글을 한꺼번에 보냈다. 받은 음악에 구미가 당긴 에버렛은 곧장 시애틀로 취재를 떠났다. 그는 현장에서 첫 주엔 머드허니 커버 기사, 둘째 주엔 레이블에 대한 후속 기사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 그의 취재는 ‘서브 팝 시애틀: 록 시티SUB POP SEATTLE: ROCK CITY’라는 기사로 게재됐다.

(그들은)록 스타가 되려는 계략도, 지적인 시각도,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없다 (...) 그들이 만약 록을 하지 않았다면 슈퍼마켓 점원이나 벌목꾼, 아니면 자동차 정비공이 됐을 것이다. 커트 코베인(원문에선 ‘Kurdt Kobain’으로 썼다)은 아직 어린 축에 들지만 위대한 작곡가다. 그는 열정을 담아 리프를 만들어낸다.

에버렛 트루, 『멜로디 메이커』 기사 일부


『멜로디 메이커』만이 아니었다. 에버렛은 영국 유력 음악 매체인 『NME』에도 ‘세상에, 시애틀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는 커버 기사를 썼다. 또한 3개월 뒤 “모든 장르의 신예 아티스트를 홍보한 전설적인 디제이” 존 필John Peel은 《Sub Pop 200》에 대해 “60년대 중반 디트로이트의 모타운 레이블이 전 세계를 정복한 이후 볼 수 없었던 지역 음악의 증거”라는 호평을 영국 『타임스The Times』에 기고했다.


중요한 건 영국 대중이 저 말들을 믿었다는 사실. 이는 딜런 칼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갑자기 공연장에서 영국 기자들이 많이 보였어요. 영국 음악 매체에 시애틀에 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한 거죠.” 찰스 R. 크로스에 따르면 그들은 브루스와 조나단이 비행기 표까지 제공하며 시애틀로 불러들인 영국 록 평론가들이었다. 『Selling Seattle』의 저자 제임스 라이언스James Lyons의 말대로, 그렇게 서브 팝은 영국 음악 타블로이드의 도움으로 “먼 항구 도시의 작은 바에서 연주하는 소수 밴드들을 록의 잠재력으로 홍보”할 수 있었다.


머드허니 전설의 EP 《Superfuzz Bigmuff》. 적어도 영국에서 '그런지 무브먼트'의 시작은 버트홀 서퍼스도 스크래치 애시드도 아닌 이들이었다.


마케팅 효과는 금세 드러났다. 머드허니는 곧장 유럽으로 투어를 떠났고, 그들의 EP 《Superfuzz Bigmuff》는 영국 인디 차트에 1년 이상 머물렀다. 이는 당시만 해도 전례가 없던 일이다. 그런지 스타일은 분명 버트홀 서퍼스나 스크래치 애시드 같은 밴드에서 시작됐지만, 적어도 영국에서 ‘그런지 무브먼트' 스타는 머드허니였다.


이 모든 걸 지휘한 브루스는 영국인들이 시애틀 음악에 열광한 이유로 “지역 정체성과 풍미”를 꼽았다. 레이블과 신scene으로 구분하는 록 음악 역사를 이해한 덕분에 자신과 조나단, 마크 암과 커트 코베인, 태드와 잭 엔디노, 찰스 피터슨을 영국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다는 논리다. 피터슨은 그중 ‘레이블의 풍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브루스는 일관성 있는 디자인과 스타일이 담긴 음반 슬리브 사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클래시의 《Sandinista!》 정도를 빼곤 전례가 없던 트리플 박스 세트(《Sub Pop 200》)에 밴드들의 개성, 그들간 가족적인 면모, 공연의 흥겨움이 고스란히 담긴 16페이지 분량 사진 책자를 넣자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keyword
이전 18화첫 번째 시애틀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