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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의 두 번째 드러머

by 김성대
4인조였던 1989년 너바나 라인업. 왼쪽이 제이슨 에버맨, 가운데 아래가 채드 채닝이다.


6학년 때 채드를 처음 만났어요. 나와 친구들에게 채드는 신비로운 아이였습니다. 우린 걔를 성숙하고 세련된, 이국적인 사람으로 인식했죠. 나중엔 긴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채드와 스톤 크로우Stone Crow라는 스래시 메탈 밴드에서 함께 연주하기도 했어요.

제이슨 에버맨Jason Everman


채드 채닝의 등장이다. 《Bleach》로 너바나 역사를 처음 접한 사람에겐 너바나의 첫 드러머로 기억될 인물. 채드는 1967년 1월 31일 캘리포니아 주 산타로사Santa Rosa에서 버니스Burnyce와 웨인 채닝Wayne Channing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친분이 있었다는 웨인은 라디오 DJ였다. 아빠가 직장 일로 캘리포니아, 미네소타, 하와이, 알래스카, 아이다호를 6개월 간격으로 옮겨 다닌 탓에 채드는 '친구란 그저 일시적인 관계'라 여기며 자랐다. 태권도를 배웠다는 채드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13살 때 사고로 허벅지 뼈가 부러져 좌절했다. 몸이 정상으로 회복하기까지 채드는 거의 7년에 걸친 재활과 수술을 겪었다. 그 사이 누나가 기타를 배우고 있었고 채드는 바이올린을 잡았다. 그러다 누나가 거의 치지 않던 기타를 손에 쥔 채드. 동생은 다시 드럼에 호기심을 갖는데, 학교 마칭 밴드에서 스틱을 잡는다. 지미 헨드릭스의 동료인 미치 미첼Mitch Mitchell과 펑크 록 밴드 엑스의 드러머 D. J. 본브레이크D. J. Bonebrake를 좋아한 채드는 졸업반 때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병원에 있느라 학교 공부를 너무 많이 놓쳐 졸업장을 받으려면 몇 달 동안 여름학교와 야간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채드가 처음 몸담은 밴드는 1982년 워싱턴 주 아나코테스Anacortes에서 학교 친구들과 결성한 펑크 록 밴드로, 머릿속에 악상이 많이 떠올라 커버 곡이 없었다고 한다. 채드는 이때부터 밴드 편력을 시작, 같은 주의 야키마Yakima에선 뉴에이지 밴드에 몸담았다가 다음엔 멜빈스 풍 음악을 했던 마인드 서커스Mind Circus에서 활동했다. 훗날 사운드가든에 베이시스트로 들어가는 벤 셰퍼드Ben Shepherd가 마인드 서커스에서 기타를 쳤다. 앞서 제이슨 에버맨이 얘기한 메탈 밴드 스톤 크로우는 채드가 17살 때 속했던 팀으로, D.R.I.나 커러전 오브 컨포미티Corrosion of Conformity 같은 하드코어 펑크 밴드들과 한무대에 섰다. 장르도 지역도 제각각인 밴드들을 거친 채드는 뮤지션이 되고 싶었지만 길을 찾지 못했다. 선택지는 남들과 같은 노동 현장이었다. 시애틀에서 페리를 타고 퓨젯 사운드Puget Sound를 건너 도착하는 베인브리지 아일랜드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한 채드는, 밤에는 친구들과 연 파티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때를 기다렸다.


커트는 1989년 인터뷰에서 맬펑션을 "시애틀 그런지 사운드의 창시자"라고 언급했다.


채드는 이상한 꼬마 요정 같은 친구였어요. 그는 늘 밝고 다정했죠.

케리 그린(Kerry Green, 밴드 딕리스Dickless 기타리스트)


밝고 다정한 성격 이면에서 채드는 커트처럼 과잉행동장애ADHD를 앓았다. 부모님은 별거 중이었다. 그런 채드를 커트와 크리스가 처음 만난 건 커뮤니티 월드 극장 공연에서였다. 너바나는 아직 블리스Bliss라는 이름에 머물러 있었고, 채드는 틱 돌리 로우Tick Dolly Row에서 드럼과 보컬을 겸하던 때다. 채드는 데이브 포스터가 드러머였던 당시 블리스 무대를 이렇게 보았다. “커트는 지옥 같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한쪽 끝엔 에펠탑만 한 크리스가 서 있었다.” 커트와 크리스는 채드가 가진 커다란 노스 드럼North Drums을 눈여겨보았다. 너덜거리는 랙탐Rack Tom을 강력 테이프로 붙여 쓰곤 했던 녀석으로, 노스 드럼 고유의 관악기 모양 탐탐Tom Tom은 커트가 그때까지 본 것 중 가장 이상한 물건이었다.


드러머 채드에 대한 확신은 안 섰던 걸까. 커트와 크리스는 비어있는 드럼 자리를 태드 도일에게 부탁하려다 『더 로켓』에 구인 광고를 낸다. “헤비와 라이트함을 겸비한 펑크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블랙 플래그, 스크래치 애시드, 버트홀 서퍼스. 드러머를 찾습니다.” 광고에 딱히 반응은 없었고, 너바나의 스틱은 두 사람이 다시 커뮤니티 월드 극장에서 만난 채드의 손으로 가려했다. 데이먼 로메로Damon Romero라는 친구가 그곳에서 열린 맬펑션Malfunkshun 고별 공연 때 커트와 크리스를 채드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전에 커뮤니티 월드 극장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기억을 못 하더군요. 커트, 크리스가 드러머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채드를 둘에게 소개해준 겁니다.” 맬펑션은 1984~85년에 글램 록, 하드록, 헤비메탈을 버무린 음악을 구사한 밴드로, 커트의 말처럼 “시애틀 그런지 사운드의 창시자 중 한 팀”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커트가 맬펑션의 기타리스트 케빈 우드Kevin Wood에게 너바나 합류를 제안했을 때 케빈이 거절했다고 한다. 케빈은 커트를 그저 자신들의 팬이겠거니 여긴 거다. 저들의 독특한 밴드 이름은 식기 세척기 위 팻말에 있던 글귀(‘오작동 보고Report Malfunction’)에서 따왔다.


너바나 합류 전 채드 채닝이 연주한 노스 드럼. 커트와 크리스는 관악기 같은 랙탐이 달린 노스 드럼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친구 소개로 만나 두 사람과 잠시 말을 나눈 채드도 너바나라는 밴드에 확신은 들지 않았던 듯하다. 그나마 저들이 하는 음악은 마음에 든 눈치였다. “음악이 단순하면서도 보컬 멜로디가 정말 멋지다는 점이 나를 끌어당겼어요. 커트는 단순한 것으로 좋은 사운드를 빚어내는 데 능숙했죠.” 올림피아 에버그린 대학에서 밴드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서야 크리스 네서 잼을 약속한 채드. “둘은 나에게 ‘좋아, 우리 팀에 들어와’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난 그냥 거기 가서 계속 잼을 했을 뿐이에요.” 너바나의 두 번째 드러머 영입 과정은 분명 얼렁뚱땅이었지만, 원년 멤버들의 뜻을 관철시킨 얼렁뚱땅이었다.


찰스 R. 크로스의 책을 보면 커트, 크리스와 차를 타고 애버딘 구경을 한 채드의 소감이 나온다.


마치 브롱크스The Bronx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제기랄’.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곳은 정말 별로였다. 갑자기 슬럼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애버딘은 아마 워싱턴 주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을 거다.


채드에겐 밴드 상황도 지역 상황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커트와 크리스는 오래된 매트리스, 굿윌Goodwill 스토어에서 구한 카펫, 셸리와 트레이시가 직장에서 가져온 계란판, 공사장에서 주워온 폐목재 따위를 이용해 크리스의 집 지하실에 리허설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하나 연습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당장 시끄러운 소리를 이웃이 싫어해 늦은 시간까지 합주를 할 수 없었다. 한날은 크리스와 셸리의 애완용 토끼가 합주실로 내려가는 전선을 씹어 먹기도 했다. 덕분에 밴드는 새 전선 살 돈을 마련할 때까지 일주일 동안 리허설을 멈춰야 했다. 당시 암울한 상황은 커트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너바나는 펑크 스타일로 헤비 록을 연주하는 트리오다. 평소 멤버들은 백수다. 즉, 언제든 투어를 할 수 있다는 얘기지. 너바나는 단 한 번도 <Gloria>나 <Louie, Louie>로 잼을 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이 곡들을 재가공해 자신들 곡이라 부른 적도 없다. 너바나는 직접 만든 음악을 바이닐로 내려 2천 달러 대출을 받으려는 중이다.” 밴드는 가난했다. 크리스의 베이스 캐비닛에 바퀴가 없어 오랫동안 각재투바이포, 2X4를 깔아 운반해야 할 정도였다. 솔루션은 크리스에게 있었다. “내 밴이 있었는데, 그게 돌파구였다.”


1988년. 채드를 맞고서도 너바나는 여전히 가난했고, 합주실은 누추했다.


과연 고비는 사람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일까. 새 드러머를 맞은 너바나는 힘든 환경 따위엔 신경을 끈 채 커트가 메인 리프를 제시하면 나머지 두 사람이 합류하는 형태로 빠르게 곡을 써나갔다. 드럼 몸집은 포스터 때처럼 과감히 줄였고, 거기에서 태어난 <Big Cheese>, <School> 같은 곡들은 일주일 두 세 차례 리허설 중 자연스레 팀 레퍼토리로 옮겨갔다.


채드를 새 멤버로 들인 너바나는 88년 5월에 두 차례 공연을 했다. 이전 데이브 포스터와 섰던 보그에서 한 차례이는 채드의 첫 너바나 공연이었다, 다른 하나는 올림피아에서 활동한 길리 앤 해너Gilly Ann Hanner 서포트 무대였다. “(너바나는) 어떤 에버그린 밴드와도 달랐다. 그들 사운드는 듣는 사람 몸 안에서 울린다.” 이후에도 너바나 라이브에서 줄곧 재현될 '시끄러운 피드백 세션'이 가미된 공연을 본 해너는 너바나를 그렇게 기억했다.


“너바나는 라이브로 연주할 때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고 쓴 돈 앤더슨의 『백래시』 기사는 그러나 “충분히 연습만 한다면 멜빈스보다 나은 밴드가 될 수 있다”는 이면의 희망도 전했다. 앤더슨의 밝은 전망은 “처음 가장 두려웠던 건 사람들이 우리를 멜빈스 짝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고 털어놓은 커트의 고민에 대한 순수한 격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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