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70년대 음악 신을 대표한 프로그레시브록 밴드 요닌 바야시(四人囃子). 데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기타리스트 모리조노 카츠토시(森園勝敏)를 중심으로 모리조노의 고등학교 동창인 오카이 다이지(岡井大ニ, 드럼), 베이시스트 나카무라 신이치(中村真一)가 모여 처음엔 3인조로 출발했다. 밴드가 4인조가 된 건 사카시타 히데미(坂下秀美, 키보드)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1970년에 결성된 밴드는 이듬해 토다이 5월제(東大5月祭)에서 데뷔 무대를 치르고 73년 싱글 ‘20세의 원점(二十歳の原点)’으로 공식 데뷔했다. 록과 포크가 유행했던 당시 일본 대중음악이 제 갈길을 잃고 방황할 때 핑크 플로이드에 영향받은 요닌 바야시의 등장은 음악계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74년 6월, 밴드 이름이기도 한 하야시(囃子, 피리와 북 등으로 흥을 돋우는 반주 음악)를 프로그레시브록에 녹인 데뷔앨범 [일촉즉발(一触即発)]을 발매한 밴드는 그러나 멤버 교체를 겪으며 잠시 주춤했는데 키보디스트 모기 유타카(茂木由多加)가 들어오고 나카무라 신이치가 탈퇴한 것이다. 나카무라의 공백은 이후 플라스틱스(プラスティックス)에서 활약하며 일본 테크노팝 시대를 이끈 뒤 보위(Boowy), 글레이(Glay), 주디 앤 메리(Judy And Mary), 175R 같은 대어들의 앨범에 프로듀서로 관여하게 되는 사쿠마 마사히데(佐久間正英)가 메우고 밴드는 5인 체제로 싱글 '하늘을 나는 원반에 동생이 탔다네(空飛ぶ円盤に弟が乗ったよ)(75)'를 내놓았다.
정돈된 라인업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76년 5월 두 번째 앨범 [골든 피크닉(ゴールデン・ピクニック)]을 발표하고 밴드의 중심이었던 모리조노가 탈퇴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리조노가 밴드의 중심이긴 했으되 밴드의 모든 것은 아니었기에 요닌 바야시는 이후에도 앨범 발표 등 활동을 계속 해나간다. '일본의 데이빗 길모어' 모리조노는 탈퇴 후 퓨전 밴드 프리즘(プリズム)에 잠시 몸담았다 1년 뒤 솔로 기타리스트로서 홀로서기를 감행,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찾아 떠났다. 그는 이후 90년대~2000년대에 걸쳐 밴드의 이벤트성 재결성 때 다시 요닌 바야시의 무대에 서기도 한다. 사람이 뿌리는 쉬 잊지 못하는 법이다.
모리조노를 보내고 새 기타리스트 겸 보컬리스트로 사토 미츠루(佐藤ミツル)를 맞아들인 밴드는 77년작 [프린티드 젤리(PRINTED JELLY)]와 테크노 시대를 예감한 [바오(包)](78)를 내놓으며 위기를 잘 수습하는 듯 보였으나 79년작 [네온(Neo-n)]을 끝으로 긴 침묵에 빠지고 만다. 딥 퍼플과 레인보우의 오프닝 밴드로 활약한 것을 비롯해 프랭크 자파, 뉴욕 돌스, 제프 벡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던 그들의 70년대는 팝과 헤비메탈이 지배할 새 시대 앞에서 조용히 마감되었다.
하지만 10년 뒤 요닌 바야시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깨어나는데 바로 89년작 [Dance]였다. 결성 때처럼 3인조(오카이, 사카시타, 사쿠마)로 돌아가 내놓은 이 앨범을 끝으로 요닌 바야시는 사실상 해체했다. 정통 프로그레시브록을 지향한 1집과 2집, 팝 성향이 배인 3집과 4집, 테크노 사운드를 덧댄 10년 터울의 5집과 6집까지. 하드록, 싸이키델릭록, 프로그레시브록에 향수(郷愁) 어린 비현실적인 가사를 접목했던 요닌 바야시는 일본록이 아직 뚜렷한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그 길을 가리킨 가장 진지한 대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