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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Dec 02. 2020

브러쉬로 쓸어담은 사랑과 이별, 김현철 'Brush'


때론 음반의 커버 사진과 제목이 그 안에 담긴 음악을 요약해줄 때가 있다. 청바지 입은 캐롤 킹이 고양이와 함께 있는 소박한 모습이 작품 속 곡들과 편곡 성향에까지 그대로 이어진 ‘Tapestry’나 분신하는 베트남 승려 사진으로 랩 메탈이라는 음악 장르와 공산주의라는 정치 장르를 함께 표현한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데뷔작 등은 그 좋은 예들이다.


얼마 전 나온 김현철의 미니앨범 ‘Brush’도 그렇다. 브러쉬란 드럼 스틱 중 하나로, 주로 점잖은 재즈나 느리고 조용한 곡을 연주할 때 쓴다. 브러쉬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앨범 ‘Brush’ 커버 사진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브러쉬인가. 사실 앨범 ‘Brush’는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의 솔로작이라기 보단 프로듀서 김현철이 그간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역을 건드린 작품에 더 가깝다. 예컨대 좋아했던 후배(정밀아)의 곡을 흠모했던 선배(최백호)의 목소리에 엮어본다든지, 언제나 그의 음악 한 지분을 차지해온 장르(보사노바)를 대선배인 정미조에게 맡겨보는 식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평소 구상한 음악 그림을 마음껏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드럼 스틱이자 앨범 제목인 브러쉬는 바로 그 ‘김현철의 음악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바탕 또는 도구로서 의미를 띤다. 음반 ‘Brush’에서 프로듀서 김현철이 챙긴 정서는 지나온 사랑과 이어갈 사랑의 고백, 이별 후 추락하는 감정, 비와 고독, 상실의 슬픔이다. 이것들을 주현미와 최백호, 정미조와 김현철이 한 곡씩 나눠 부른다. 하나같이 쓸쓸하고 한 숨 섞인 이 체념의 무채색 공간에서 무너진 감정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이 바로 브러쉬다.



브러쉬는 작은북과 심벌 언저리를 문지르고 쓸어서 비트를 흘려낸다. 물론 나무 스틱처럼 그들을 때려서도 비트를 훔쳐낼 수 있지만 이 앨범에선 그러지 않는다. 본작에서 브러쉬는 나무 스틱과 다른 브러쉬 고유의 역할에 충실하다. 즉, 리듬을 끊어서 얻는 활기와 박력 대신 리듬을 절이고 억누른 끝에 다다르는 낭만에 브러쉬는 더 다가가 있다. 이 브러쉬를 잡고 있는 사람은 바로 드러머 이상민이다. 이상민은 아는 사람은 알 재즈 테크니션으로 유명한데 단, 이 앨범에서 만큼 그는 잭슨 폴록의 추상적 즉흥보단 몬드리안식 상상의 미니멀을 자신의 연주에 대입했다. 한마디로 기존 그가 잘 하던 어지러운 프레이즈 대신 단촐하고 소소한 리듬 라인을 곡들에 담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이상민의 브러슁은 곡들 앞에 나서지 않되 곡들의 나중을 책임지는 든든한 음악적 배후로서 작품에 기여한다.



첫 곡은 주현미다. 주현미는 중년 이상에 이른 부부가 리마인드 웨딩 때 가질 만한(서글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이중 감정을 깊은 호흡으로 토해 낸다. 이 노래를 부르는 주현미는 당연히 ‘신사동 그 사람’이나 ‘짝사랑’을 불렀던 주현미가 아니다. 지금 주현미의 목소리는 그때처럼 들떠있지 않고 작품 속 다른 보컬리스트들과 같이 가라앉아 있다. 그 가라앉은 톤에서 굵은 바이브레이션이 일렁이며 곡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트로트 가수’ 주현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곡은 다소 낯설겠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일탈로 기억될 확률이 높다.


두 번째 곡은 최백호다. 눈썹 하나에도 풍경을 가졌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목소리에 풍경이 깃든 최백호의 목소리는 먼 후배인 정밀아의 곡에 그야말로 “우두커니 앉”았다. 정밀아판 ‘서른 즈음에’인 원곡을 최백호는 서영도의 어쿠스틱 베이스와 조삼희의 나일론 기타 위에 녹슨 회한을 얹어 다시 불렀다. 이상민의 브러쉬는 그 회한이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마치 배가 무변대해를 바라고 떠나듯 북과 심벌을 하염없이 밀어낸다.


재즈 뮤지션 유발이가 불어 가사를 쓴 ’Écoute, la pluie tombe’(봐, 비가 내리고 있어)’는 정미조의 몫이다. 조삼희의 기타와 빗소리로 빗장을 푸는 이 곡에서 정미조는 최근 자신의 정규 앨범 제목처럼 ‘바람같은’ 목소리를 들려준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있었는지도 모르게, 그러나 분명히 곡을 이끌고 있는 이상민의 브러쉬 드러밍은 여기서도 곡이 지향하는 브라질의 낭만을 위한 가장 중요한 포석으로 곳곳에 서식하고 있다.


마지막 곡 ‘너는 내겐’은 김현철 자신이 부르는데, 과연 앨범에서 가장 따뜻하고 쓸쓸하다. 이 느낌은 이태윤의 프렛리스 베이스와 조삼희의 일렉트릭 시타르, 권병호의 아이리시 휘슬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그러므로 이 음반은 ‘프로듀서 김현철’의 앨범임을 다시 강조하게 된다. 이 곡 외에도 김현철은 이상민의 브러쉬 근처에 핵심 악기들을 배치, 각 곡들이 가진 다른 감정선을 드러내려 애쓴 느낌이다. 가령 ‘Remind Wedding’에선 권병호의 아코디언으로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미래를 다짐하는 리마인드 웨딩의 감동을 자아냈고, ‘우리들의 이별’ 위에 떠도는 최재문의 안개 같은 트럼본은 이별한 자의 묵직한 슬픔을 잔잔히 지지했다. 물론 정미조가 부른 ’Écoute, la pluie tombe’에서도 김건의 스트링 어레인지가 없었다면 곡은 지금보다 덜 로맨틱 했으리라.


비록 완전체 정규작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라면 완전체 정규작을 노렸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앨범이 끝난 뒤에도 계속 든다. 부디 ‘너는 내겐’이 이 앨범의 끝이 아닌 다음 앨범의 예고였으면 좋겠다. 못다한 얘기는 그때 가 다시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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