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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Jun 02. 2022

미디어 아트로 듣는 음악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50년대를 시발점으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지나 컴퓨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90년대 이후 본격 정립, 진화해온 미디어 아트는 한마디로 기술(Technology)과 예술(Art)의 이상적 타협이었다. 오디오와 비디오, 그림과 사진 등 일상의 대중매체가 공간 및 수단 상 제약 없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그런 미디어 아트는 지난 30년간 가장 첨단이면서 본질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사람들은 예술과 기술의 그 내밀한 소통 덕에 음악을 눈으로 보고 그림을 귀로 들으며, 영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아트는 견고했던 예술 장르의 방어벽을 허문 황홀한 기술적 철퇴였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요즘 같은 오버 테크놀로지 시대에 가장 주목받는 미디어 아트 범주라면 단연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이다. 이는 빛으로 이뤄진 3차원 영상을 대상물 표면에 투사해 그 대상이 지닌 현존성을 다른 차원에 이식하는 기술로, 보는 사람들에겐 마치 그림 동화나 영화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착시에 기반한 화려한 연출을 통해 사람들을 공감각적으로 매료시키는 프로젝션 맵핑은 콘서트 무대나 제품 프로모션, 광고와 전시회 등에 두루 쓰이며 향후 그 응용 가능성이 무한대로 뻗어나갈 미래형 토탈아트로 자리매김해 있다.     



오는 6월 15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Ⅳ - 황홀경'은 바로 이 프로젝션 맵핑과 음악이 만나 기존 레퍼토리들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을 입혀낸 결과물이다. 프로젝션 맵핑은 이번 공연에서 자연음향 연주, 즉 전통악기로 편성한 관현악 고유의 소리를 담아내는 연주를 위한 필수 무대 장치인 음향 반사판을 캔버스 삼아 그야말로 전에 없던 ‘황홀한’ 미디어 아트를 그려낼 것으로 보인다.     


기술이 탑재된 예술적 크로스오버를 구현한 '황홀경'을 통해 관객들을 만날 국악관현악 작품은 총 다섯 곡. 악단의 정체성과 예술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선곡된 해당 작품들은 작곡가 개인들의 내면과 개성을 더해 곡 하나하나가 이미 독립된 세계성을 담보한 느낌이다.     


첫 곡은 에스닉 팝 그룹 '락(RA:AK)'을 거쳐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음악 조감독을 맡았던 작곡가 김창환이 쓴 국악관현악 '취(吹)하고 타(打)하다'로, 2019년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음악 지평을 넓히기 위해 기획한 '3분 관현악' 공연에서 작곡가 10명이 선보인 작품들 중 하나다. 당시 평균 나이 33세였던 젊은 작곡가들이 3분이라는 시간 테두리를 거쳐 각자 역량을 펼쳐 보인 이 공연에서 김창환은 궁중 의식과 잔치 때 연주하던 연례악(宴禮樂) 중 취타의 선율, 장단을 녹여 국악관현악을 한 뼘 더 성장시켰다.    

 

두 번째 곡은 장석진의 '초토(焦土)의 꽃'이다. '불에 타서 검게 된 흙'을 뜻하는 동시에 '흔적 없이 사라진 것'에 비유되는 비장한 제목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에서 꽃 한 송이를 피워내듯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인류의 모습"을 반영한다. 2000년도부터 걸어온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브랜드 공연인 '2020 겨레의 노래뎐'에서 위촉 초연된 이 작품은 "이념을 뛰어넘은 한반도 음악으로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를 노래하고자한 취지에서 어쩌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더 큰 울림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벨기에 음악가 보두앵 드 제르의 'The Lion Dance'는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함경남도 북청군 민속놀이인 '북청사자놀음'을 소재로 만든 곡이다. 사자에게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행사였던 만큼, 북청사자놀음은 대사의 맛이나 풍자보다는 흥겹고 힘찬 사자춤 묘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보두앵 드 제르의 작품 역시 원작 속 '교묘한 활기'를 음악에 그대로 녹여 독창적이고 발전적인 재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국악관현악 ‘금잔디’(김대성 작곡) 미디어아트 아이디어 스케치 중 일부. 사진=월간 국립극장.


월북 작곡가 리건우가 김소월 시에 붙인 동명의 가곡 선율에 기반한 김대성의 '금잔디'는 작곡가 자신이 중국 요동에 있는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던 중 본 꽃 한 송이를 "험난한 역사를 견딘 고구려인과 오늘날 민중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삼아 만든 국악관현악이다. 2019년 '내셔널 & 인터내셔널' 공연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 위촉으로 처음 무대에 선 '금잔디'는 재담과 재주로 마을의 풍년, 평화를 기원했던 지영희의 경기도당굿 중 올림채 장단 등을 직접 채보해 소재로 사용한 곡이기도 한데 여기서 올림채란 쳐올리는 장단으로, 쳐올린다는 건 신을 놀려 좌정시킨다는 뜻이다. 3박과 2박의 빠른 올림채 장단은 결국 '금잔디'의 구성에서 절정을 책임진다.     

마지막 곡은 김성국이 작곡한 국악관현악 '영원한 왕국'이다. 평안남도에 있는 고구려 고분 강서대묘(江西大墓) 안에 그려진 벽화인 사신도를 우연히 본 작곡가가 영감을 받아 쓴 '영원한 왕국'은 거장 윤이상이 현대음악의 호흡으로 그려내기도 한 사신도 속 고구려인의 기상과 예술적 혼이 가진 "오묘한 에너지"를 각각의 주제선율로 표현한 작품이다. 김성국은 이를 위해 "삼도농악 리듬과 경기도당굿의 장구 소리, 동해안별신굿의 다양한 변박 등을 녹였다"고 작곡 배경을 밝힌 바 있다.     


국악관현악 ‘영원한 왕국’(김성국 작곡) 미디어아트 아이디어 스케치 중 일부. 사진=월간 국립극장.


이렇듯 개성 넘치는 다섯 곡을 관객석으로 이끌 예술감독과 지휘자에는 각각 김성진과 박상후가 임명됐다. 김성진은 국악과 해외 현지 음악을 조화시킨 "동서양을 아우르는 섬세한 지휘"를 인정받아 제7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전통의 경계에서 밖을 바라보는 악단"으로 규정하는 그는 "관객들이 한국 음악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감각을 배양"하는 데서 예술감독의 사명감을 본다.


중앙대학교에서 학부 최초로 국악지휘를 전공한 박상후는 서양 악기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서른셋 나이에 유학 간 독일 함부르크 브람스 음악원에서 오케스트라 지휘를 전공해 지금에 이르렀다. 실력과 인성에 기반한 "연주 단원들과 관객과의 소통"을 좋은 지휘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그는 "전통음악에 뿌리 둔 한국 창작 음악의 가능성"과 "국악관현악 양식의 미래"를 늘 염두에 두고 정진하는 젊은 인재로, 이번 '황홀경'은 그런 박상후를 증명할 최적의 무대가 될 것이다.     


미디어 아트 이이남(왼쪽) / 지휘 박상후. 사진=월간 국립극장.


이제 남은 건 '황홀경'의 소리 세계를 미디어 아트에 도킹시키는 일. 이 임무를 맡은 사람은 '제2의 백남준'이라 일컫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이다. 800 여회 기획전과 국내외 비엔날레 전시로 독창적 미디어 아트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로 평가받는 그는 '황홀경'의 연주곡 중 '금잔디'와 '영원한 왕국'을 미디어 아트로 변주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언젠가 글쓴이는 담양 죽녹원에 있는 이이남아트센터에서 그의 작품들을 직접 본 적이 있다. AR과 VR, AI 같은 첨단기술로 조르주 쇠라, 미켈란젤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이 종횡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게 하는 "움직이는 회화"를 비롯해 김홍도의 '묵죽도'와 정선의 '박연폭포',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우는 여인'과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다빈치의 '모나리자' 등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명화들로 펼친 작가의 파격적 상상력은 그것만으로 또 하나의 생명체요 우주였다. 60인조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연주를 등에 업고 높이 12미터 음향반사판 위에 펼쳐낼 이이남의 미디어 아트가 관객들을 어떤 '황홀경'으로 안내할지. 그 '생명의 우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 글은 <월간 국립극장>에도 편집본으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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