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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Jul 04. 2022

행복한 삶을 위한 우울한 긍정

해파 [죽은 척하기]


물 세상에서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것처럼 제게 무언가 중요한 생존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함 있는 상품, 중요한 재료가 빠진 요리, 물에 뜨지 않는 배, 가라앉지 않는 잠수함이 된 기분이 들 때는 몸을 웅크리고 죽은 척을 했습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슬퍼하며 어떤 일도 생기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모든 것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다음 날이 오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앨범 소개글에서

선뜻 다가가기 힘든 기괴한 제목('죽은 척하기')에 관해 작품 주인은 꽤 긴 썰로 그 안의 뜻을 전했다. 아니, 굳이 말을 통하지 않아도 제목이 가진 스산한 진실은 당당함과 불안함이 함께 깃든 재킷 속 슬픈 시선으로도 이미 충분히 전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거대하고 공포스러운 파도"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해파에게 일상은 그래서 "기대도 아쉬움도 없는 내일"의 연속이다. 느리고 희미한 무중력 사운드, 일렁이는 소리의 굴절, 지친 목소리, 반전도 절정도 없는 구성의 소극성은 그 무기력을 포괄하는 나름의 음악적 장치일 터.


앨범 '죽은 척하기'는 "무엇이 행복인지 알려주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도망치듯 떠나"온 자의 넋두리다. 타인 같은 자아에게 건네는, 불안과 고독이 공존하는 이 쓸쓸한 독백은 지금 "도망가고, 숨어보고, 떼를 쓰고, 울고, 조롱하고, 화를 내"고 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소외된 노래의 주인공은 "새하얀 밤에 까만 발자국을 새겨넣"듯 그렇게 음악을 열기 삼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뒤틀려간다.


해파는 이 어둡고 투명한 관조를 그릇 삼아 ('춤'의 가사처럼)분노와 체념, 사랑을 끈적하게 엉겨 다소 무기력한 우리를 그 안에 빠뜨린다. 그런 해파의 음악에는 "물 세상"이 투영된 영롱한 '나의 언덕'이 증명하듯 영화 '토니 타키타니' 같은 검푸른 미니멀리즘이 있다. 무채색의 체념이 유채색의 행복을 갈망할 때 벌어지는 역설의 슬픔 같은 것이 그 최소한의 음악에선 들려온다.



이 작품에서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라는 밴드 편성은 때리고 미끄러지는 현란한 연주 대신 스치듯 침착한 상념으로 곡들에 스미는 쪽을 택했다. 적어도 6번 트랙 '춤'까진 그렇다. 분위기는 '예쁘게 아름답게'의 왈츠에서 조금씩 바뀌는데, 그럼에도 음악은 일관되게 공허와 염세를 맴돌며 "죽은 듯 가만히 숨죽이"고 살아온 해파의 나른한 울분을 거든다. 뻔한 멜로디를 거부하고 게으르게 풀어헤쳐지는 저 저돌적 절망은 어느새 '커다란 망치'에 깃든 웃음마저 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앨범은 열 한 번째 트랙에서 록 사운드로 한 번 크게 뒤척이긴 해도 '다음 번에 갈 때는'에서 이내 가지런한 피아노 위에 내려앉으며 감정의 결론이 달리 흩어지지 않도록 그러모은다.


그러나, 그럼에도 'I'm Finally Ghost'로 점철된 해파의 우울은 생의 나락을 피해 생의 환희를 더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버거운 세상살이일지라도 개인의 존엄과 정의의 소멸을 해파가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그런 해파의 음악에서 회피를 가장한 해피(Happy)에의 투신을 본다. 이 음반은 음반의 주인이 죽은 척하고 지낸 지난 6년간 그 투신을 위해 곱씹은 뜨거운 각오임에 틀림없다.



*이 글은 <마이데일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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