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2)
귀국한 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것이, 서울의 도로엔 참 신호등이 많구나 하는 것이었다. 거의 200~300m마다 촘촘히 신호등이 있다는 것.
런던의 그 교외 동네엔, 그리고 central london으로 나가도 사실 마찬가지였던 것 같은데, 신호등이 별로 없다. 특히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악명 높은 roundabout(라운드어바웃, 로터리 같은 걸로 생각하면 된다)에서도 신호등이 없다는 것은 꽤나 난감한 일이었다. 거기에선 오른쪽 차 우선 등 큰 틀에서의 원칙에 따라, 적당히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알아서 가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관련 브리핑을 하면서 방역수칙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도, 새삼 참 촘촘하고 세세하게 어떤 데선 어떻게 하라는 지침을 발표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예를 들어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경우 비급여[건강보험에서 커버 안 되는 것] 외에는 모두 급여[건강보험으로 커버되는 것] 같이 negative system으로 규율하여 비급여 항목만을 정하고 있는데, 만약 이를 positive system으로 정한다면 건강보험으로 커버되는 급여항목을 세세히 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방역수칙은 postitive system을 취하는 듯 보이는데, 이런 규율방식은 때때로 어떤 것을 규율하는냐 마느냐, 다른 것과 형평성을 갖추고 있느냐는 문제가 더 잘 부각된다는 경향이 있다.)
영국에선 Lockdown을 하면서, 비필수적인 가게는 문을 닫으라 하면서(그리고 2021년 9월 말까지 furlough scheme이라고 하여, 봉급의 80% 수준에 이르는 급여를 나라에서 보전해 주는 제도를 시행했다. 내가 알던 일본인 Yaska는 라멘집 알바와 일본인 가정의 nanny 일을 겸하고 있었는데, 2020년 11월 잉글랜드 lockdown 때도 라멘집은 운영을 안 하지만 봉급은 furlough scheme으로 받는다고 했다. 이러한 정책 이후 재정 부담으로 2021년 초 향후 5년간 법인세 인상 방침을 발표하기도 했고, 여름엔 설탕이나 소금에 붙는 세금을 올리겠다는 계획도 발표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barber shop 등을 닫으라 했고, 식료품이나 의약품 등은 계속 살 수 있다고 했으며, 우리나라처럼 홀덤펍, 감성주점, 스터디카페 등등 업종(영국의 경우 업종 분류가 그렇게 자세히 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지침을 내리진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들의 학교로 가던 길에 있던 꽃집은 lockdown 때도 문을 열고 있었다. (물론 영국인들은 gardening에 진심이고, 꽃이 워낙 대중화되어 있어, 마트에서도 화분이나 꽃을 쉽게 살 수 있었고, gardening 도구들을 파는 가게는 barber shop 등과 동일한 시점에 reopen을 허용하는 등 그 중요성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로선 꽃집은 필수업종이 맞을까 늘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click and collect라고 하여, lockdown 기간에도 온라인숍에서 물건을 주문하고 실제 가게에서 물건을 찾아갈 수 있도록 가게가 일정 시간 문을 열고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방역수칙 위반이 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 사이에선 그 정도는 excuse가 되는 것 같았다.
물론 lockdown을 해도 그렇게 철저하게 하지 않은 것이, 방역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면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귀국 후 얘기해 보면 lockdown 기간 동안엔 우리가 문 밖에도 못 나가는 걸로 생각했었다는 분들이 계셨는데, 2020년 상반기 첫번째 lockdown 때는 영국에 없었기에 잘 모르겠지만, 2020년 11월에는 학교 전면등교가 계속 유지되고 교육 목적 외출도 다 허용되어 우리 가족 입장에선 사실 큰 실감을 하지 못했었고, 알파 변이로 인한 lockdown이 있었던 2021년 1월 즈음에도 mental health 유지도 강조되고 exercise를 위해서 하는 외출은 규제하지 않아서, 주변에 큰 녹지와 공원이 많은 우리 동네에선 아이들과 함께 매일 산책이나 운동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늘 동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초기에 종교시설에서의 코로나 집단감염을 겪은 때문인지 우리나라의 경우 방역수칙에서 종교행사에서의 인원 제한 등이 세세히 발표되지만, 영국에선 영국발 변이(알파 변이)로 인하여 lockdown을 했던 2020년 12월, 2021년 1월 즈음엔 정부 차원에선 정례적인 종교 행사는 허용되었으나, 런던의 교구장이 자체적으로 대면미사를 금하는 등, '규율'과 '규제' 면에서 빈 공백, 느슨한 면이 많았다. 그 공백은 자연스럽게, 알아서, sensible하게 채워 가야 하는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요즈음 뉴스를 보면 그게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걸 영국사회에선 지금 또 아프게 깨닫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park라고 이름 붙은 것들도, 우리나라의 경우 아기자기하게, 열심히 뭔가 설치해 놓고 꾸며 놓는다면, 영국은 잔디 관리 등을 하고 자연에 대한 관리는 하지만, 그 안의 구조물은 거의 없다는 그런 차이가 있는 듯했다. 그런 여백 속에서, 생각을 자기 나름대로 채워 가면서 존 로크, 홉스, (스코틀랜드의) 흄, 아담 스미스, 최근의 리처드 도킨스 등의 사상도 싹트고 셰익스피어, 코난 도일,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워즈워스, 엘리엇, 브라우닝, 바이런, (스코틀랜드의) 월터 스콧 등 많은 문학가들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는 좀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던 영국살이 1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