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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목 Jul 29. 2020

솔직함만이 명예를 지킨다.

Speech Coach Story

“잘 들었습니다. 멍청한 구라쟁이가 되고 싶으신 거죠?”

“뭐요?”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대표님은 멍청한 구라쟁이, 아 구라는 일본말인가? 거짓말쟁이가 되려고 하고 있어요.”


원고를 들고 있는 김 대표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비서의 표정은 더 일그러지면 괴상할 지경이 됐고. 아마 나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 순간에 변하지 않은 건 코치의 표정과 목소리뿐이었다. 


여기는 V사. 모 그룹인 V 그룹에서 가장 알짜배기 계열사다. 최근 2세, 아니 3세 경영으로 바뀐다고 말이 많았던 곳이다. 경영자로 취임하는 재벌 3세 김 대표에 대한 소문을 미리 조사했는데, 명문대 졸업에 해외 유명 대학원, 그리고 해외 유명 기업들 근무 경험을 거쳐 차근차근 계열사를 돌며 사원부터 이사까지 경험하고 대표로 취임한, 아주 전형적인 패턴의 낙하산 인사였다. 

그런 그의 취임사 코치 요청이었다. 특이했던 건 대표가 직접 코칭받기를 원해서 생긴 자리였다는 것이다. 부하직원이 제안해서 자리가 만들어진 경우는 있었어도, 직접 요청했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리 알아본 현장의 목소리는 아주 좋지 않았다. 업의 특성상 현장 경험이 꽤 중요한 데다가 노사 갈등도 강한 상황이었다. 전문 경영인이 아닌 낙하산으로 온 대표가 곱게 보일 상황이 아니었는데 심지어 직원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김 대표가 현장 경험을 했던 곳, 팀장으로 프로젝트를 맡았던 곳이 V 사였으니까. 


그때 평가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처음에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고 팀이 실적 1위라는 성과도 냈지만, 그게 타 부서에서 실적을 몰아줘서, 또 프로젝트 선정에서 우대받았다는 게 들통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도망치듯 타 계열사로 가버렸으니. 수습과 책임은 결국 누군가가 했어야 했고 남은 팀은 와해되어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낙하산을 타고 대표로 돌아왔다. 분위기는 뻔하지. 대놓고 싫은 내색을 보일 수는 없어도. 


그를 처음 만난 자리, 첫 피드백 자리가 오늘이었다. 내가 미쳤지. 코칭하는 걸 보여 준다는 말에 신나서 따라왔더니 이런 분위기다. 


코치는 표정 없이 말을 이었다.


“온통 자랑과 업적으로만 이뤄진 자뻑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은 당신에게 콩고물을 기대하는 아첨꾼들뿐이겠죠. 그걸 마치고 아첨꾼들의 찬사를 들으면서 뿌듯해하신다면, 그건 좀 멍청이 같지 않을까요? 제가 군대에서 많은 멍청이들을 만났거든요. 진짜 자기 이야기가 멋진 줄 알지만, 우물 안 개구리한테 비교해서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임원들한테 아부 듣기에는, 그리고 있어 보이기에는 딱 좋은 스토립니다. 어차피 업적들 다 부풀리신 것 아닙니까?”


“어허 말씀이 좀!?”


“됐어요. 계속하시죠.” 비서를 손으로 제지하며 김 대표가 말했다. 


"내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에 MSG를 섞은 게 아니라 이 정도면 MSG에 사실 한 톨 넣은 수준이던데요? 네. 부끄러우시라고 드리는 말씀 맞습니다. 


아무리 함께 잘해보자!라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거짓은 힘이 없어요. 특히 본인이 구라 치는 걸 알고 치면 티가 팍팍 납니다. 프로 구라 꾼인 정치인들이 하는 말들, 왜 설득력이 없겠습니까? 뭐, 속는 사람이야 늘 있지만요.


대표님한테 힘든 성공스토리가 있었다는 걸 누가 믿겠습니까? 재벌 3세인 거 다 아는데... 사람들은 기껏해야 부자의 배부른 투정 같은 걸로 느낄걸요. 게다가 엄청 권위적이시던데 왜 이리 소탈한 척 쓰셨어요? 나중에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다시금 제지하려는 비서에게 김 대표는 말했다.

“박실장 님. 잠깐 나가 계시죠.”


불안한 표정의 비서는 괜히 노려보면서 나갔다. 

침묵이 흘렀다. 

‘더럽게 숨 막히네. 괜히 따라왔어…’


얼마나 지났을까, 대표가 입을 열었다. 

아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말투로. 


"후… 쪽 팔리네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쪽 팔린 건데. 좋아요. 까놓고 말해보죠. 솔직히 나 같은 놈이 대표가 된 걸 실력 덕분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다 회장인 아버지 덕이다 생각하고 있겠지. 맞아요. 내가 말한 이력들, 다 구라나 다름없지. 돈으로 안 되는 거 없더라고. 


아, 여기 팀장으로 왔을 때 실적? 처음에는 내가 이 악물고 해서 얻은 줄 알았어. 지금까지 아버지가 믿고 맡겨주신 일들 다 별로였으니까. 그래서 뭔가 보여드리고 싶었지. 진짜 그때 열심히 했거든? 그리고 실적이 우리 부서가 탑이 된 거야. 근데 그것도 알고 보니 다 실적 몰아주기였더라고. 프로젝트 선정 과정도 눈치껏 임원들이 선정한 거고. 참 나. 쪽 팔려서. 더 쪽 팔린 건, 여기서 할 만큼 했으니 다른 데서 이사 경험을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제일 후회되는 건데… 도망친 거지 뭐. 더 해보겠다고 말 한마디 못했어. 팀원들 보기 쪽 팔리게.


그런 내가 대표로 딱 들어왔는데 누가 좋게 보겠어? 그러니 뭐라도 있어 보여야지. 그럴듯한 이력에 힘든 고난을 이겨 낸 성공스토리 붙여서 만들고, 공감 갈만 한 스토리 넣고. 권위의식 없는 척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젠장." 


"궁금한 게 있습니다. 대표님, 굳이 스피치 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그럴듯한 내용 적어오라고 시키고 읽으세요. 뭐 하러 본인 열등감에 불 지르는 거짓말만 하려고 해요?"


"…"


"열심히 해보고 싶으신 거, 맞죠?"

"..."

"제가 그래도 나름 이 업계에서 잘 나가는 코칩니다. 근데 CEO 스피치 코치는 별로 안 해봤어요 강연회에서 만난 것 말고, 사내 스피치는요, 두어 번쯤 했나? 노조로 유명한 곳 아시죠? 거기에서 서로 좀 잘해보자 그런 의미로, 그것도 본인이 요청한 게 아니라 부하직원 분들이 전전긍긍하면서 불러서 해드린 적 있었고…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대부분 대표님들은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셔서 그런가? 아까 말한 것처럼 내부에서 나쁜 피드백받을 일도 없으니 그렇겠죠. 회사는 군대보다 더 한 곳이니까요. 아니면 누가 잘 써다 주는 거 읽거나. 어차피 그래도 상관없는 거죠. 누가 귀 기울이기라도 하겠습니까? 어차피 그럴듯한 말들만 할 테니까요. 공수표 남발하면서. 


근데 대표님은 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를 지목해서 찾으셨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글도 직접 써 오셨고… 어쨌든 메시지는 심기일전해서 함께 잘해보자는 내용이었고요. 진짜 이번엔 한 번 잘해보고 싶으신 거죠? 


대표님. 차라리 저한테 말씀하신 것처럼 하세요. 

내가 대표가 된 것에 대해 불만 많을 거다. 현장 경험도 별로 없고… 회장 아들이라 된 것 맞다. 대단한 이력처럼 보여도 다 거저먹은 거나 다름없다. 이렇게요."


"장난쳐요?"


"저는 진심입니다. 대표님이 용기를 내시겠다면, 저도 도와드리죠." 


취임사 장면 전환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대표. 소개를 받는 표정에서 긴장감을 지울 수 없다. 박수소리가 나오고 단상으로 올라갈 시간. 작게 한숨을 내쉬고 올라간다. 잠시 침묵.)

"반갑습니다. 아마 제가 반갑지 않으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반갑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아버지는 V 그룹 김 ㅇㅇ회장님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경영을 잘해서도, 경험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회장 아들이라서 온 것 맞습니다. 소개해 주신 이력, 다 거저먹은 겁니다. 계열사, 협력사 돌아다니며 만든 거고, 학력도 겉만 번지르르하지, 학점은 다 별로였어요. 


저랑 일해 본 분들 계시죠? 아시다시피 저 이곳 처음 아닙니다. 팀장으로 근무했었죠. 

솔직히 그때 열심해했었어요. 실적도 잘 냈고, 팀 분위기도 괜찮았습니다. 생색내는 거냐고요 아, 저도 압니다. 몰아주기 받아서 실적 1등 했다는  거. 해외 프로젝트도 다 떠먹여 준 거. 그땐 솔직히 몰랐지만 말입니다. 

그거 들통나고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가서 우리 팀 박살 났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도망친 건 아니었는데. 그 오해는 당사자들과 함께 풀겠습니다. 


힘든 성공스토리? 없습니다. 제가 뭐가 그리 힘들었겠습니까? 힘들게 성공을 이룬 건 어려운 취업경쟁 뚫고 들어온 여러분이지. 욕먹으면서도 실적 내면서 가족 지키는 여러분이지. 저는 그런 건 없습니다. 저도 애환이 있긴 하지만 여러분에 비하면 거저먹은 거 맞아요. 

권위의식? 저 엄청 많습니다.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서 어쩔 수 없어요. 격 없는 문화 적응 못할 겁니다. 미국에 유학파긴 한데 그런 문화는 저랑 안 맞으니까 서로 격 있게 지냅시다. 


왜 이런 말을 하냐고요? 잘해보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더는 거저먹는 것 싫고, 실력 없이, 노력 없이 대접받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이런 말 하는 것 진짜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지만... 잘해보고 싶어서 이런 말 합니다. 그래서 굳이 취임사 자리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저를 아는 분들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소문으로 저에 대한 이미지가 생긴 분들도 있을 거고요. 

'저 사람, 안 변할 걸.' 정답. 저는 별로 안 변할 겁니다. 근데 확 변하진 않아도 성장할 겁니다.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경영 능력이 부족한 만큼 전문가들 이야기 귀 기울여서 듣고, 현장 경험 부족한 만큼만큼 현장 의견 잘 반영하겠습니다.  


저도 실적 내야 합니다. 전설적인 창업주 할아버지에, 세계적 그룹으로 키운 현재 회장님, 제가 제대로 못하면 그것만큼 곤란한 것도 없어요. 잘해도 본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실력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듣기 좋은 소리 말고 실적에 도움되는 소리 많이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같이 노력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건물을 나오며 코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대단한 양반이네요 저 사람. 저렇게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절박한 상황이었나 보더라고. 후계 문제도 있고. 임원들 사이에서 평판도 중요한 시점이니 실적 제대로 내고 싶을 시점이겠지. 그래도 저렇게 파격적으로 하기 힘들었을 텐데 대단한 건 인정." 


뭔가 기대하는 눈치다. 이럴 때는 특효약이 있다. 

"정면 돌파한 대표도 대단하지만 코치님도 대단하시네요."


"결국 솔직함만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지.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거짓은 힘이 없으니까. 그게 나의 지론이지. 엣 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한껏 기가 살아서 칭찬해 달라는 눈치를 읽어서 다행이었다. 

금세 또 뻐긴다 진짜... 진짜 폼 안나는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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