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귀로 떠올린 단상 #코로나 #에세이 #사람사는이야기
귀가 아프다. 염증이 생겨서 그렇단다.
익숙한 통증이다. 고막이 터진 채 수십 년을 살며 달고 살았던 아픔이니까.
내가 효준이보다 어리던 시절, 아마 5~6살 정도였을 때였다.
나는 엄마 아빠가 귀를 파 주는 걸 좋아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시원한 그 느낌이 좋았다.
문제는 당시 나는 이상한 방면에서 주도적이었는지,
출근으로 정신없는 시간에 면봉을 들고 자기 귀를 푹 찔러 버린 것이다.
찰나의 순간 일어난 일이라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셨을 것이다.
단편적으로 그 날의 정신없던 분위기, 공포심, 한숨소리 등이 떠오른다.
우습게도 엑스레이?를 찍느라 내가 누웠던 그 판이라고 할까, 그 부분의 차갑고 딱딱한 느낌도 기억난다.
너무 어린 시기기에 수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막의 97퍼센트가 소실된 채, 그대로 살게 되었다.
그 덕에 나는 늘 중이염을 달고 살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여지없이 중이염이 함께 걸렸고,
수영이라도 할 때면 물이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기 일수였다.
덕분에 아마추어 수영선수였던 어머니를 뒀음에도, 심지어 해병대 장교 출신인데도 아직까지 수영을 못한다.
시도 때도 없이 쿡쿡 쑤시는 아픔이 참 싫었지만,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도 속상했다.
얼마 없던 고막이라 청력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지만, 심지어 고막 성형술 후에도 큰 소리는 지지직거리며 들린다. 마치 스피커 음량이 초과되면 나는 소음처럼.
여하튼 나는 잘 들리지 않는 만성 중이염 귀에 익숙해져서 살았다.
사실 나는 육군으로 지원해서 훈련소 분대장까지 했었다. 물론 첫날 하루였지만.
다소 늦은 나이였던 나는 이미 복무를 마친 친구 놈들의 놀림 섞인 격려와 가족들의 눈물을 뒤로하고 논산 훈련소로 입소를 했다. 그래,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자!라는 취지로 아무도 안 하려고 하는 분대장 훈련병을 해 보겠다고 자원도 했다. 정신없었던 첫 날을 보낸 다음 날, 별 것 아닌 줄 알았던 신체검사에서 생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청력검사에서 군의관이 "어, 이러면 면제인데? "라면서 재검 판정을 내려 버렸다.
솔직히 설렜다. '어? 진짜 면제인가? 내 면봉은 이걸 위한 큰 그림이었던가? 어디까지 본 거냐 전종목!' 이런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당시 내 잘못도 아니었지만 지인들에게 괜히 쪽팔려서 한동안 잠적하고 살았더랬다. 그 후 열심히 병원을 다니며 청력검사를 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은 큰 문제였는데도 나는 '제발 면제될 만큼 안 들려라!'라고 빌며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세상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청력은 야속하게도 딱 4급 공익근무 판정 수준까지였다.
당시 아버지는 농수산물센터에서 공익 근무 요원들을 자주 접하실 수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할 일 대충 하고 모여서 담배만 피워대는, 머리 길고 눈이 탁한 한심한 놈들.'
(하지만 정작 아버지도 방위 출신이다.)
모든 공익 근무 요원이 그럴 리 없겠지만, 아버지는 거의 확신을 하셨다.
'놀기 좋아하는 종목이의 성향 상 저들처럼 지내면서 밤에는 게임하고 술 마시고 하겠구나.'
그래서 군 문제를 고민하던 내게 말씀하셨다.
"장교로 군대를 가거라."
다른 사람 말은 죽어도 안 듣는 나지만 아버지 말씀은 철석같이 듣는 나라서 그러겠다고 했다.
기왕이면 해병대가 좋겠다는 말씀에 또 그러겠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어쨌든 나의 큰 그림은 뜻하지 않게 해병대 장교로 이어졌다.
수술로 좋아진 청력과 휴학한 김에 한 라섹수술까지, 거의 600만 불의 사나이처럼 개조된 신체로 입대했다.
그 덕분인지 동기 중 유일한 사격 만발 등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했다!
물론 나의 해병대 생활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위에 언급한 지직 거림이 있고, 가끔씩 중이염에 걸린다.
그래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다.
오히려 잘 안 들리던 귀 때문에 다른 사람 이야기를 경청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덕에 강연이나 라이프 코칭도 곧 잘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
쿡쿡 쑤시는 내 귀의 통증처럼 코로나는 불편함을 넘어 지긋지긋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랜 시간 괴롭히고 있다. 결국 또 익숙해지고, 극복할 수 있겠지. 내 귀의 통증처럼.
언젠가, 코로나 덕에 뭔가를 얻었다며 글을 쓰고 있을 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