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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공남 Oct 22. 2021

2-1. 미래 대비하자

삼일 참고 또 삼일을 참는자가 승리한다

  2028년 12월 31일. 난 만 60세가 되고 정년퇴직한다.

  2030년 1월 1일.

  앞으로 10년의 미래에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43세 이후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나는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고 그것이 책 쓰기로 바뀌고 있다. 나는 빠른 나이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이제는 후회할 시간이 없다. 2028년 되면 환갑이 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은 자라나는 나의 자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두 자녀 중 첫째는 IMF 시절에 태어났고 둘째는 2002년 월드컵을 한해로 전 국민이 시청 전면광장에서 환호하는 해이다. 지금도 두 녀석의 대학 학비는 1년에 약 2천만 원이며 나의 대학원의 학비도 있고 각종 생활비, 용돈이 많이 들어가고 있으나 아직은 안정적으로 대처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나도 서울 생활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 자녀를 가진 직장인이 자금적인 부분에서 벅차게 느낄 수 있고 나도 벅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의 도움을 IMF 시절에는 도움을 받았다. 잠깐 나의 부모님 인생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아버님은 1940년생이고 만 팔십이 넘었고 나보다 연봉이 많다. 아버님의 시절에 고생을 안 한 사람은 없을 것이고 모두가 어렵고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시대에 태어났고 일본 통치하에 있었기에 힘든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 아버님은 초등학교 졸업을 했다. 부모님은 ‘어릴 적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자식이 아니었다.’라고 하셨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 땅을 밟아야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님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부자였다. 박정희 정부의 시대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님의 집안은 큰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으로 한순간 부자에서 가난뱅이로 전락을 하였다. 잘못된 습관은 고스톱이라고 고모님이 이야기하셨다. 고모님은 큰아버지를 아직도 원망을 많이 하고 계시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게 고생을 안 해도 되는 삶이었지만 현재는 나의 부모님의 형제자매가 전국에 흩어지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시며 지금도 고생만 하셨다고 한다. 고인이 된 큰아버지는 죽음에 앞두고 고모님에게 사과하였고, 큰 형님은 비 오는 날 서해안 바다에 배를 타고 큰아버지의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나도 이런 사실은 고인이 되기 전에 고모님에게 들은 최초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 번도 큰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나의 아버님은 막둥이, 순둥이로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집안의 넷째로 초등학교 졸업 이후 20살이 되기 전에 서울에 상경하였다. 그 당시 아버님은 ‘손수레로 워커일, 구파발, 수색 등을 걸어서 다니면서 채소를 파셨다.’라고 한다. 1968년은 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말죽거리인 현재의 양재역까지 걸어서 판매하셨다. 1900년대의 인도교인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현재의 강남까지 진출하셔서 채소를 팔았다. 1971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을 때 강남 아파트의 공사가 시작되기도 한 시대였다. 나는 아버님에 대해 몰랐다. 어렵게 사셨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끔 눈물이 나고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에도 눈물이 난다. 지금은 아버님 곁에 약 1시간 반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2020년 서울의 직장을 청산하고 2021년 전라북도에서 군산에서 살고 있다. 얼마 전 아버님의 집을 약 10년 만에 가본 것 같다. 내가 부모님에게 무관심으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부모님과 같이 늙어가는 세대처럼 보이고 흰머리와 머리숱이 없다. 부모님에 대해 너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한 아들이 아니었고 항상 사고 만 치는 큰아들이었다. 나의 말썽은 항상 어머니 몫이었고 아버님은 가난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계셨다.

  지금의 아버님은 아직도 운전하고 다니시고 나주역에 주차한 후. KTX를 타고 서울에 오신다. 아버님은 농사꾼이지만 이제는 농사를 많이 접고 계신다. 나는 아버님의 기를 꺾지는 못한다. 아버님은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셨고 나름대로 미래를 위해 노력했던 분이다. 내가 아버님을 소개한 이유는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셨다. 농부의 인력관리로 농산물에 투입비용에 영향을 많이 미쳤기 때문에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신 것이다. 하루의 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력 반장을 불러 지시를 하고 인력관리를 하셨다. 내가 군대 입대 전부터 군대 제대, 그리고 직장에 다니면서 농사일을 주말마다 도와 드렸다. 아버님이 인력을 어떻게 지시하고 일을 시키는지를 항상 보고 배웠다.

  아버님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셔서 농산물 관리를 하신다. 시간별로 물, 바람, 날씨, 흙, 사람 관리 중요하다고 하신 분이다. 이제는 아버님도 첨단기술인 스마트 관련 기술을 배우기는 힘들고 휴대전화의 발달로 스마트 기술을 확보한 뭔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배우기가 어렵다. 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내일을 보고 미래를 준비하셨다.

  어떻게 보면 아닐 수 있지만, 농부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나도 농사꾼의 아들로서 항상 부지런하다. 예전에는 더 부지런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미래의 계획도 없었다. 이제는 어제의 내가 아닐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나는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

  예를 들면 1995년 아버님의 농어촌 연금을 105,800원을 약 60개월 가입한 적이 있다. 아버님의 연세는 82세이다. 지금까지 약 22년을 국민연금을 받은 금액으로는 약 10배 이상의 수익률이 발생한 것 같다. 물론 경제 지식과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 나도 만 55세부터 보험사에서 지급하는 개인연금을 받게 되어 있고 만 63세 이후 국민연금, 공무원 연금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내 나이에 시작해도 미래에 준비해도 늦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장수명 시대이고 의료기술이 발달하여 80세의 나이에도 직장보다 직업이 필요하다. 아마 2040년이면 팔십 살이 넘어도 필요한 생활비와 여유자금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나는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체력만 있으면 된다고 믿고 있다. 체력은 국력이다. 라는 말을 들어본 세대는 나처럼 40, 50대 이상은 알 것이다. 나는 80세까지 꼿꼿하게 서 있을 힘만 있으면 된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여 내 인생에 활력소를 만들어야 한다. 

  스펙이 중요하지 않은 시기이다. 자기계발서를 통한 타인의 삶도 때때로 보아야 한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아야 하며 성공한 사람들도 수많은 성공한 사람의 책을 읽었다. 머지않은 2030년 준비할 자세가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사십과 오십 사이의 저자인 김병숙 교수는 앞으로 “50년간 개척할 진로를 정하여야 한다고 한다. 10년 주기로 하나의 직업을 정하여 최소한 5개 이상의 직업이나 진로 분야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직장보다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고, 가족 관리가 잘 돼야 자신의 삶도 평온해지고, 그리고 배우자, 자녀, 양가 부모님 등의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생의 과정에서 새판이라는 것을 짜라고 강도하고 있다. 저자는 건강관리를 15분이든지 10번의 횟수로 자신만의 체력을 보강하여 습관적으로 하면서 인생에 필요한 자신만의 역량을 확보하라고 강조한다. 이 저자는 인생의 위기를 기회를 전환하는 데 전략이 필요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새로운 시나리오를 작성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내가 중요하다고 매번 강조한 내용과 부합되는 글이다. 사람은 미래를 위해 지금도 항상 개선되고 발전된 모습으로 살기 노력한다. 독자인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삼일 참고 또 삼일을 100번만 참으면 1년의 세월에 밝은 미래가 당신에게 선물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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