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집은 무엇일까?

마흔이 돼서야 깨달은 삶의 이치를 고전의 대화를 통해 말하다.

by 이로
”내 아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니? “
”오즈의 나라에 있었어요. “
”토토도 같이 있었어요. 오, 엠 아줌마! 집에 다시 와서 정말 기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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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딸이 있어 퇴근 후 빨리 집에 들어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지만, 어린 시절 집은 그런 곳이 아니었어.


주사가 심했던 아버지가 밤 9시까지 안 들어오시면 난 불안에 떨어야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이불 뒤집어쓰고 잠들어 버리는 것뿐. 그러다 싸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야만 했지.


말려도 보고 중재도 해보았지만 이도 저도 안 되는 날엔 듣기 싫어 집을 나간 적도 있었어. 짙은 어둠이 깔린 골목길, 그 어디선가 나는 혼자 떨고 있었지.




내 어릴 적 기억과 달리 도로시에게 집은 따스한 ‘정’이 기다리는 곳이었어. 물론 그 집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헨리 아저씨와 엠 아줌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에 돌아가고 싶었을 거야.


그럼 이 책이 출간된 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에게 집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왜 집을 떠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는 것일까?


고 신해철이 만든 그룹 NEXT 1집 ‘집으로 가는 길’에는 이런 가사가 담겨 있어.


‘집을 떠나올 때에 마음은 무겁고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네.
어머니는 나에게 슬픈 눈으로 꼭 그래야만 하느냐 했지.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은 누군가가 내게 준 걸 따라간 것뿐.
처음 내가 택한 길이 시작된 거야.’



처음 이 노래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리 와 닿지 않는 가사 않았어. 그러다 세월이라는 나이를 제법 먹은 어느 날, 이 가사가 나의 기분을 ‘툭툭’ 건드렸지. 어릴 적 내가 살았던 시대의 집들은 가족의 향기가 진하게 베여있는 곳이었지.





때론 투박하고 구수하기도 했던 그런 향기가 서려 있는 곳. 그 안에서 서로 살을 맞대고 자라며 진한 추억의 향기를 만들어내곤 했었지. 그렇게 자란 우리는 어느덧 어른이 되었고 자신이 살던 그 집을 떠나게 되었어.


부모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새롭게 열릴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문을 나서게 된 거지. 그런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는 대견하면서도 불안하고 안쓰러웠을 거야.


태어나 스스로 자아를 찾을 때까지 자신이 살던 집은 소설 데미안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알’이야. 거칠고 험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었던 그 알을 깨야만 진정 새가 될 수 있었던 그날, 젊은 날. 자신이 살던 집은 세상을 향해 박차고 나와야 할 ‘알’이었어.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자신의 삶은 거칠고 거친 세속의 바람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게 되지. 나만 이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고 주변의 격려도 받아보지만 그때 일뿐.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을 알아갈수록, 느는 건 꿈과 자신감이 아닌 남들처럼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불안감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헛된 욕망뿐이었지.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는 자존감도 있었고.


겉으로는 당당하게 아무 걱정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기댈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그러다 결국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은 시험에 낙방한 후 잠시 모든 것을 접고 엄마와 함께 살던 고향집으로 내려오게 돼. 그곳에서 농사일하며 어릴 적 친구들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지.


혜원은 어릴 적엔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의 말과 자신이 이곳으로 떠나온 이유를 상기시켜준 친구들 덕분에 자신을 돌아보게 돼.


‘이제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만들어야겠다’라고 말한 그녀처럼, 지치고 힘들 때 마음의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곳은 다름 아닌 우리가 살던 집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지.


기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다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집으로 향하게 하지만, 실제 현실 속의 집에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오히려 가족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며, 심지어 다시는 안 찾아온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꾹 참아야 할 때가 더 많지.


그렇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지만 정처 없이 떠다니는 우리에게 집은 여전히 놓칠 수 없는 기대감과 다시 만나고 싶은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야. 내 삶의 원천, 그리고 미래를 향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곳이 바로 집이었던 거지.


그렇게 정서적인 안정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삶의 힘을 주었던 그곳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집이었다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집은 아직도 그런 존재로 남아있는 걸까?


아쉽게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이제 빛바랜 사진첩에 고이 접어둬야 할 것 같구나.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내가 살던 집과 골목은 경제개발과 맞물려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미명 아래 무차별적으로 헐리게 되었지. 물론 그 자리는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게 되었지만.


그 후 아파트는 가족과 이웃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란도란 정을 나누는 곳이 아닌,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단번에 확인시켜주는 기준이 되었어. 또한 미래의 불로소득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욕망의 대상으로 변질되어버렸지.


사람들은 심각한 부의 편중과 복지의 사각 그늘 아래서 조금이라도 세련되고 편리한 그리고 투자가치가 있는 곳을 찾아 헤매듯 떠돌아다니게 되었지.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당연시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삶이 아닌,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 이 차단된 각자도생 하는 삶으로 바뀌었단다.


그럼 우리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예전과 같은 집과 골목이 있어야만 사람들 사이에 ‘정’이라는 강이 흐를 수 있는 걸까?


도로시는 사실 처음부터 헨리 아저씨와 엠 아줌마와 함께 살았던 건 아니었어. 고아로 자란 자신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해준 덕분에 그들과 함께 살았던 공간이 자신의 집이 된 거지.


하지만 오즈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어. 기다리는 사람도,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 집으로 돌아갈 바엔, 차라리 신분을 감추고 자신이 만든 집, 즉 에메랄드 성에 갇혀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혈연이 아니더라도 같은 지붕 아래 소통하고 정을 나눌 수 있다면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어. 다시 말해 가족이 머무는 곳이면 그곳이 자신의 집인 거지. 그렇게 혈연을 넘어 이웃과 함께하는 마을공동체의 활성화는 막혀버린 인간의 ‘정’을 흐르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지. 그리고 그 시작은 같은 승강기를 타고 있는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가벼운 인사로부터 시작될 수 있단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가는 길’의 가사를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해볼까 해.



‘한참을 망설이다 버스에 올랐지
우~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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