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만큼 아는 것이 많아질 수 있을까?

마흔이 돼서야 깨달은 삶의 이치를 전의 대화를 통해 말하다.

by 이로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으니 너보다 아는 것이 많은 건 당연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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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딸아이와 놀다 보면 가끔 알파벳을 이용한 놀이를 할 때가 있어. 책에 나온 동물 그림을 보고


“아빠, 이건 괌 친구들이 뭐라고 불러?”


하고 물으면 대부분 자신 있게 대답하지만, 엄마 아빠가 ‘영알못’ 인지라, 혹시 엉뚱한 질문이 아이 입에서 튀어나올까 항상 조마조마하지.


물론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오더라도 번역 어플만 열면 척척 알려주는 좋은 세상이지만, 아이는 핸드폰 보지 말고 바로 알려달라고 하니 이럴 땐 대략 난감.


어쨌든 그날도 몇 가지 동물 이름을 영어로 척척 알려주었고, 궁금해하는 숫자도 알려줬어. 그랬더니 아이는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어.


“아빤 대단한 거 같아,
괌 친구 말도 잘 알고 숫자도 잘 맞추니 대단해.”



뜻밖의 칭찬을 들으니 순간 멍 했어. 내가 대단하다니.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고.

속으로 난 “너도 나이를 먹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될 거야.” 이렇게 말해주었지.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생각하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야. 여기서 ‘아는 것’ 이란 학문을 통해 배운 지식도 해당되지만 그보다 삶의 경험으로 알게 된 ‘산지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어.


아무래도 자신보다 세월의 숫자가 많은 사람이 하나라도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건 당연지사. 그런 의미로 본다면 이 말은 모순이 아닌 정답에 가까운 말이 되지.


그런데 내 나이 40 중반이 되던 어느 날, 윗글의 첫 문장을 본 순간, 갑자기 태클 걸고 딴지도 걸고 싶어 졌어. 왜? 막상 나이 먹어 보니 생각만큼 아는 게 많아지지 않아서? 뭐 이런 말 하고 싶었던 거야? 응?




불교 ‘열반경’에 맹인모상(盲人摸象)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어. 옛날 인도의 어떤 왕이 여섯 명의 장님을 불러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고 각자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에 대해 말해보도록 했지.


먼저 상아를 만진 장님은 무 같이 생긴 동물로, 귀를 만진 장님은 곡식을 까불 때 사용하는 키로, 다리를 만진 장님은 절구 공 같다 말했다고 해. 등을 만진 장님은 평상 같다 하고, 배를 만진 장님은 장독 같다고 주장했어. 꼬리를 만진 장님은 굵은 밧줄 같다고 말했고. 이에 왕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어.


“보아라. 코끼리는 하나이거늘,
여섯 장님은 제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진리를 아는 것도 이와 같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도 장님 같은 게 아닐까? 장님의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 앨리스보다는 많았겠지? 한 살이라도 많다면 정답까진 아니더라도 근접한 답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이를 먹으면 아는 것도 많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거니까.




사람은 자신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좀 살아봤네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세상을 살아보니 말이야” 뭐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하지. 마치 나이만큼 세상 이치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야.


특히 자신의 아들 뻘, 손자 뻘 되는 사람들에게 “내가 자식 같아서 하는 말인데”라는 말로 시작하며 절대 충고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지. 그러나 결말은 ‘너 그렇게 살지마’ ‘세상은 그런 게 아니야’ 식과 같은 뉘앙스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야. 만약 자신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면 한번 확인해봐야 해. 자신이 그 유명한 ‘꼰대’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코끼리 상아만 만져본 장님은 자신의 지식만으로 그것을 ‘무’라고 단정 지으며 정답이라고 우기기 시작하지. 설사 자신의 논리를 반박한 정확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조작되고 은폐되었다고 말하지. 이건 스스로 우기기의 끝판왕 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증거야. 편협한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 우기는 기술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필살기 중의 필살기인 것 같아.


그와 반대로, 비록 나이는 어리더라도 그와 상반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님들의 갑론을박이나 우기는 행동 등에는 전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아. 그저 의미 없는 말싸움이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 같은, 뭐 그런 거라 생각하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 알면 알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이 세상엔 자신이 모르는 것들로 이미 꽉 채워져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 사실 앞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작고 소박한 것인지를.


자신이 모르는 정보나 지식들이 얼마나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사람은 겸손해지지. 절대 내가 남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할 필요가 없게 된 거지. 어차피 가늠할 수 없는 지식의 크기 앞에서 너와 내가 알고 있는 건 도진 개진이니까.




그러고 보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어. 여물지 못한 벼 이삭은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빳빳이 서 있기 마련이지.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쭉정이’란 소리를 듣게 되지.


요란한 빈 수레와 그걸 타고 다니는 빈 깡통이 콜라보가 되어 내 주변과 사회, 그리고 세상을 시끄럽게 할 뿐. 그 소리 때문에 정작 자신을 향한 말은 듣지도 못하게 돼. 어쩌면 영원히 말이야.


아무것도 모를 땐 얕게만 보였던 그 깊이가 배우면 배울수록, 알 수 없는 그 깊이가 더해지기 마련이야. 그건 마치 지구가 포함된 태양계라는 존재를 인간은 알아냈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 끝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지.


어쩌면 인류가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우주라는 공간처럼 말이야. 그 공간에서 우리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게 얼마나 하찮고 작은 존재인지 조금은 상상이 되겠지?


그 우주라는 공간 안에 지구, 아니 그 우주 앞에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면 그건 바로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절구통이라고 하는 오류를 더 이상 저지르지 않는 것 일거야. 그것이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세상을 배우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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