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생기 넘치는 표정. 쉴 새 없이 터지듯 입까지. 이 정도면 아무리 피곤이 하늘을 찔러도 귀까지 쫑긋 세우며 안 들어줄 수가 없었어.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내게,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곤 하지. 마치 큰일이라도 있었다 듯이 말이야.
내겐 사소하고 작은 일에 불과했지만, 5살 딸아이에겐 모든 것이 신비롭고 새로웠던 일. 그런 딸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와 아이가 서로 교감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그런데 이와는 달리 내 주변에서는 공감과 신뢰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어. 아이의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는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불만의 벽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지.
그 벽 너머로 상대에 대한 불만과 관심을 토로하고 있지만 두텁게 쌓은 벽을 뚫지 못한 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었지. 그저 필요한 말만 오갈 뿐,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침묵의 공간.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일 거야.
그런데 부모 자식 사이는 원래 이런 사이가 아니었어. 응?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고?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와 이런 사이였다고? 그럼 다들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고. (다들 기억나지?)
우리가 갓난아기였을 때만 하더라도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 몸짓만으로도 옹알이 만으로도 부모는 기쁘기 한량없었으니까. 그때 그런 행동은 당연한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떤 말도 필요 없었던 거지.
아이는 점점 커서 더듬더듬 말을 하기 시작했고 삐뚤빼뚤 글자까지 쓰기 시작했어. 비록 어눌할지언정, 상형문자 같을지언정 부모는 그런 모습 자체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을 테니까.
그러다 특정분야에 대한 관심이나 재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높은 집중력과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지. 이윽고 주변에선 ‘천재’ 또는 ‘신동’이라는 말과 함께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며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려주었지. 신동.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잖아?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주변의 기대와 달리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마련. 반대로 어릴 적엔 남보다 못한 실력을 가진 아이였지만 커서는 남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있어.
잘나든 못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 내 아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알기에 따로 그것에 대해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지.
문제는 머리가 훌쩍 커버린 자식과 이미 돌처럼 굳어버린 부모와 같은 기성세대와의 갈등이었어. 부모는 과거 자신들이 살아오던 방식 그대로를 답습하며,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인양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이렇게 해야 대학에 갈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천편일률적인 행동을 요구하면서 말이야.
아이들은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어. 대학도 좋고 성공도 좋지만 무엇보다 본인 인생은 본인 스스로가 판단해서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강하게 들기 마련인데도 말이야.
부모가 보기에 어른이 보기에, 한없이 어리게만 보이고 무엇을 하더라도 어설프게 보일 뿐이니까. 곁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봐 주는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 어른들은 좀 쑤시듯, 참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게 되지.
세상 물정에 민감한 아이들의 머리는 한마디로 ‘말랑말랑’ 한 젤리와 같지만, 세상과 쇄국정책을 선언한 어른들의 머리는 바위보다 단단한 그저 ‘머리’ 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야.
당연히 이들 사이에는 신구 갈등만이 존재하게 되고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을 가리켜 ‘꼰대’ ‘개저씨’ ’ 답정너’라는 속어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우회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어. 말해봤자 입만 아픈. 말할 필요도 없는 그런 존재로 각인될 뿐이지. 그렇게 그들 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고, 깊은 골만큼이나 그들 사이의 벽은 산처럼 높아만 갔지.
“어려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이와 늙어서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는 이는 모두 말할 가치가 없다.” _성대중의 <청성잡기> 중에서.
우리가 상대에게 어떤 말을 할 땐, 자신의 생각이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야.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까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말부터 꺼내기 일쑤였지.
들을 준비가 안된, 어쩌면 듣고 싶지 않은. 무작정 치고 들어온 그 말은 비수가 되어 고유한 나의 가치와 기준을 침범하게 되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나의 자존심 만이 헌신짝처럼 남아 있을 뿐.
너와 내가 그랬듯 상대방의 말 보다, 내 말 내 생각이 더 관철되기를 바라왔어. 나 보다 나이가 어릴수록, 직급이 낮을수록, 재산이 많지 않다고 느낄수록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지.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차라리 소 귀에 경이라도 읽는 게 소에게나 나에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를 터. 눈과 귀를 닫고 ‘소’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야.
누군가 내게 말할 가치를 못 느낀다는 건, 매우 슬픈 일이야.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없다는 의미니까. 만약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말에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말을 스스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자신에게 말할 필요조차 못 느낄 정도로 자신의 말만 강요하지 않았는지, 상대방의 의견이나 말을 무 자르듯 싹둑 자르지 않았는지 말이야.
우리 스스로 꼰대 되는 걸 지극히 싫어하고 혐오하지만, 자신이 꼰대의 위치에 서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기란 쉽지 않아. 또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도 많아 헛갈리기도 하고.
그런데 자가진단 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어. 그건 바로 상대가 내게 자주 말을 걸어주는지, 그리고 내 말을 잘 들어주는지 그것만 안다면 진단은 바로 끝.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려는 뉘앙스를 풍긴다면, 자신의 말 보다 먼저 상대의 말부터 들어주면 어떨까? 조선시대 맏며느리 클래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 들어주고 또 한 번 들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꼰대라는 꼬리표는 영영 따라다니지 못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