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출퇴근할 때가 있었다. 매끄러운 구두와 날 선 바지 그리고 영화 킹스맨처럼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면 나르시시즘이 주는 쾌감에 풍덩 빠지곤 했었다. 일명 자뻑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비록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충격에 발은 아팠지만 도시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에 합류하기 위해 이 정도 아픈 건 아픈 게 아니라고 발에 세뇌까지 시켰다.
그러다 나이 듦과 운동 부족으로 건강에 빨간 불이 깜박거리기 시작하면서 먹고 마시는 생활습관에 변화를 줘야만 했다. 방법은 운동과 식단 조절. 그중 걷기는 나 같이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바쁜 출퇴근 시간 동안 제대로 걷기 위해 제일 먼저 바꿔야 할 건 바로 나의 신발. 딱딱한 구두에서 말랑말랑한 운동화로 바꿔야만 했다. 다행히 회사에선 신발부터 옷까지 유니폼으로 갈아입어야 하기에 출퇴근 복장은 꼭 정장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편한 운동화와 청바지 그리고 깔끔해 보이는 세미 캐주얼로 깔 맞춤까지. 그렇게 나의 출퇴근 옷차림은 중역처럼 무겁고 진지한 모습에서 가끔 눈이 나쁘신 할머니가 대학생으로 볼 정도로 편하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더 이상 숙취해소용이 아닌 진짜 내 몸의 컨디션을 위해 라이프스타일을 통째로 바꿔야 하는 대대적인 내부공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자 오랜 지병을 앓고 있던 내 마음에도 좋은 변화가 감지되었다. 월요병의 시작을 알리는 개그콘서트를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밤부터 시작되는 알 수 없는 육체피로는 아로나민 골드로도 해결할 수 없는 병이었다. 약 먹듯 꾹 삼키며 맥주병처럼 가라앉은 마음을 부여잡고 고단한 월요일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서는 출근길은 지금 내가 출근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작은 설렘을 안고 떠나는 여행자의 마음처럼 둥실둥실 가벼웠다. 그렇게 무겁게만 느껴졌던 현관문도 손도 대기 전 저절로 열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무리 묵직한 월요병을 삼켰더라도 푹신하고 가볍게 튀어 오르는 발걸음은 내 몸을 거쳐 마음까지 전해 졌다. 캐주얼 차림의 옷과 운동화는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그리고 어딘가 얽매이지 않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얀 벚꽃과 초록 빛깔이 만개한 봄 길을 걸을 땐 운동화만큼 나를 가볍게 하는 것도 없으리라.
그런데 그런 발걸음으로 걸을 때마다 한두 번 정도? 운동화가 나를 귀찮게 할 때가 있다. 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는 출근길. 아무래도 발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조금 급한 마음을 담아 발걸음을 재촉할라 치면 어김없이 한쪽 발에 조여져 있던 긴장감이 탁 풀리며 순간 느슨해지곤 한다.
다리에 힘을 빼고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본다. 분명 신발 위로 가지런히 매듭 져 있던 나비. 하지만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봄 내음 가득 피어오르는 꽃을 찾아 날아가 버린 걸까.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무릎을 꿇고 풀어헤쳐진 끈을 양손으로 매만지며 묶어야 했다. 그때 손톱처럼 매끄럽고 단단했던 끈에서 어째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매듭지을 기운조차 없어 보이는듯한 느낌까지 들면서.
신발을 들여다봤다. 겉으로 멀쩡해 보였지만 군데군데 크고 작은 상처들로 즐비했다. 그렇게 상처 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양 손가락으로 끈을 잡고 요리조리 교차해 또 한 마리의 나비를 만들어 본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떠나지 말라는 마음을 담아 약간의 힘을 줘본다. 내 의지가 전달되었는지 신발은 다시 기운을 차린 듯 팽팽해졌고 그 기분은 발목을 거쳐 몸 전체 그리고 내 마음까지 전해졌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는 남자 주인공 인우가 여자 주인공 태희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이 있다. 아, 신발 끈을 묶어주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 있나 싶었지만, 현실은 내 신발 끈은 내가 묶어야 했고 1초라도 빨리 묶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우리 마음은 본능에 가까운 나머지 따라가지 못하는 몸을 다그칠 때가 많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속 이상은 점점 부풀어 오르지만 몸은 그만큼 따라 오르기 어렵다. 내 몸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 또한 그렇다.
다시 신발을 내려다봤다. 인간의 삶만큼이나 거칠고 거친 인생 밑바닥과 맞닿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 또한 견뎌내야 할 운명. 자신을 강하게 조이는 힘 앞에 끊어짐 없이 자신의 마음 또한 단단히 매듭 져야 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강해질수록 자신에게 전해지는 그 힘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순순히 버티고 견뎌낼수록 자신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까? 자신을 단단히 조였던 그 나비는 더 이상 자신을 위로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일까?
산다는 건 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필요로 하지만 때론 모든 걸 내려놓고 무심히 버텨야 할 때도 있다. 버틴다는 건 또 다른 내 삶의 의지니까. 삶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거니까.
하지만 버티는 것 자체도 버거울 때도 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버티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니까. 죽지 못해 산다는 건, 죽고 싶을 정도로 살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므로.
차분히 끈을 묶고 있는 내게 말해본다.
‘조금 느슨해지자고, 힘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쩌면 나 잘되자고 힘주어 걷는 것뿐인데 내 의지가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다. 더 잘해보려고 한 것뿐 인데, 더 열심히 하려고 한 것뿐인데.
분초를 다투거나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달려도 좋다. 신발 끈이 풀린 채 달려도 좋다. 단 몸과 마음에 삶의 여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리고 그 여백을 지키고 싶다면, 내 신발에 매달린 나비가 달아나지 않도록 조금 느슨히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 느슨함이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