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대엔 글씨에 대해서도 AI처럼 위험성을 우려하는 시선이 있었다. 새로운 수단은 언젠가 보편화될 경우에 돌아보면 논란의 대상이 된 경우가 많다.
오늘날 한국인의 자부심이 된 한글은 쉽고 대중친화적인 과학적 문자로 그 우수성이 세계에 입 중 되고 있지만, 세종의 한글 창제 당시는 최만리의 상소를 비롯해 반대도 심했다.
그건 한자 위주의 지식전수와 언어생활에 익숙한 양반 상류사회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지만
"어린 백성을 어엿비 여긴" 세종의 애민정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이자 최대의 사망원인은 세 가지였다. 굶주림과 전염병, 전쟁이었다. 아직까지도 인류는 아무리 혁신을 거듭해도 이 세 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숫자로는 아사자가 첫 손에 꼽히고 중세의 페스트나 코로나 사망자, 전사자가 그 순위를 잇고 있다.
세 가지는 아직까지 미해결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거기에 더해 기계문명의 혜택에서 나아가 기계인간이 우리를 위협할지를 걱정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지만 세 가지 인류의 적에 비해면 이는 기우에 그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일자리를 위협하고 왜곡된 저널리즘에 이용되고 창작과정에서 다양한 표절시비를 낳을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편의성의 영역이 인류가 여태 경험하지 못한 혁신의 동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제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깨닫길 바랐던 소크라테스가 걱정한 것은 '글'이란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이 대철인도 글쓰기를 익혀 받아 적는 일을 중시해 대화의 내용을 암기해서 말로 표현하려는 의지가 역해지는 젊은이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글쓰기를 등한시하고 '복붙'이나 챗 GPT 같은 생성형 AI에 의존하는 젊은이를 걱정하는 교육자들의 마음은 소크라테스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많은 세월이 지나도 수단은 언제나 인간의 지혜를 이길 수 없음이 판명될 것임을 낙관한다.
물론, 언제나 그래왔듯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도 적절한 규제와 진흥, 거기에 따르는 성숙한 윤리의식이 세발자전거처럼 각각의 축으로 자리 잡는다는 큰 전제를 믿기에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