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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Jul 23. 2024

원작의 향기

서양 명화로 도배가 된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니 색다른 기분이 느껴진다. 그림을 뜯어보니 미술관에서 본 원작의 아우라는 없다. 미술이 예술이 아닌 기술이 될 때 위작의 유혹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화랑가에는 우리나라 작가 작품들 중에는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위작이 많아 감정의뢰도 잦은 편이라고 한다. 그만큼 원작이 값어치를 인정받고 있어서일 것이다. 위작과 원작의 경계를 가르는 안목의 힘은 어떤 것일까. 


위작에는 향기가 없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원작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 <미술품 감정과 위작> (아트북스, 2022/ 송향선 지음) 중에서


사람도 언어에 대한 신뢰가 그를 감싸기보다 불안하기 그지없는 이가 있다. 언어는 거칠고 신뢰가 잘 보이지 않고 작은 이익에 눈이 먼 경우도 있다. 언행은 좀체 일치하지 않고 위작과 같이 뭔가 불안하고 어색하다. 반면에 높고 깊은 향기를 지닌 사람이 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을 것이다.


위작으로 작가의 흉내를 그럭저럭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술가의 지난한 삶의 역정과 예술혼을 담을 순 없을 것이다. 강원도 양구의 소박한 시골 사람들 모습이며 빨래터의 아낙들을 화폭에 옮겼던 박수근, 일본에 있는 가족과 헤어진 아픔을 안고 지독한 고독과 가난을 황소의 눈에 담았던 이중섭, 전남 신안에서 올라와 서울, 파리와 뉴욕을 거치며 공간과 우주를 고민했던 김환기......


그림을 그럴듯 하게 흉내는 내도 거기에 담긴 그들의 마음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훔칠 수는 없는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조각에도 복사본은 있을 수 있지만, '디비드상'의 위작이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5m가 넘는 '다비드상'을 만드느라 거대한 대리석에 혼을 담았던 미켈란젤로를 쉽사리 흉내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천장에 매달리다시피 몇 년간을 버틴 수도사 같은 삶 또한 미켈란젤로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요즘엔 갈아 넣었다는 표현을 유행어처럼 많이 쓰지만, 미켈란젤로가 거대한 화강암을 갈아서 '피에타'를 만들고, 대성당 천장에 매달려 꼬박 몇 년을 영혼을 갈아 넣어 그렸던 일에 비길 수 있을까.


조르지오 바사리는 말한다. "그의 작품은 고통을 담고 있어서 마치 작품 자체가 부서지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그의 작품 상당수를 파괴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그는 영원을 추구했지만 예술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적당히 타협하고 만족하는 순간 미캘란젤로는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안에는 커다란 우주가 들어있다. 그 거대한 대리석 원석을 위작이나 모작을 만들고자 골몰하면서 '인생'이란 시간의 캔버스를 소모할 수는 없다.


홍혜경, 플라시도 도밍고-그리운 금강산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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