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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사회와 고체 의식

by 호림

현대사회의 성격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액체 사회라는 관점도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제기한다. 특정한 실체를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특정한 용기에서 나오는 순간 액체처럼 허물어지는 것이다.


액체사회는 그 특징의 하나로 포스트 빈곤 사회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서구에서 7,80년대 겪었다면 우리는 9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서 빈곤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특정한 감정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직업적으로도 딱히 무언가에 목을 매고 달려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귀한 아들 딸로 자식이 고작 한 두 명인 가정에서 풍부한 지원을 받고 자랐다. 여차하면 부모의 아파트는 자신의 몫이 되기에 그럭저럭 살아도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물론 많은 경우 생계와 학비를 위해 발을 동동 구르는 안타까운 젊음도 있다.


미래의 어떤 자신의 입지를 위한 공부에도 사랑에도 그다지 목숨울 걸지 않고 부유하듯 캠퍼스를 흘러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4학년이라고 하지만 그럭저럭 학점은 채워도 뭔가가 절실하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할머니가 준 상가에서 임대료 없이 카페를 큰 부담 없이 운영할 수 있다는 학생은 전공과는 무관하게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액체사회의 청년들에게는 부모 세대라면 당연히 여기고 열심히 공부해서 무언가가 되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다부진 포부가 사라진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물어보는 이유는 아마도 길거리의 낯선 이에게 당신은 미래에 어떻게 죽을 생각인지를 물어보는 황당한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그때그때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의식의 '고체성'에서 액체화는 감지되고 있다.


가끔 부족한 독서량이나 영상매체에 과다노출된 후유증은 아닐까 하는 짐작도 해본다. 어쩌면 액체화된 내면은 포스트 빈곤 시대, 즉 풍요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금수저, 흙수저는 있어서 개인차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죽어라 앞만 보고 달리거나 이게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비장함과 결연함은 없다. 이는 단순히 정신의 나약함의 문제 만은 아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이나 직장에서 후배를 리드라는 일들은 언제나 감정노동이 따른다.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구심력과 세대변화를 감지하고 색다른 방식을 찾으려는 원심력의 갈등이다. 챗GPT가 다 알려주는 내용을 쉽 없이 내뱉거나 매뉴얼에 있는 내용을 떠벌이면 귀만 아프다.


아직도 많은 지도층의 언어는 고체화돼 있다. 액체사회를 포용하는 일은 그들의 내면을 점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들의 일과 사랑에 대한 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뼛속까지 이해하는 일은 어쩌면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해법을 줄지도 모른다. 굳어진 의식을 변화시켜 액체처럼 흘러내려 변화해야 할 사람들은 어쩌면 기성세대의 다른 이름인 고체세대일지도 모른다.





Water Concerto - Tan D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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