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입니까?

by 호림

미국의 작가 웨인 다이어는 자신이 만난 최고의 스승 가운데 한 명으로 웨인 주립대학교 박사과정에서 만난 밀턴 카빈스키 교수를 꼽았습니다. 카빈스키 교수는 응용형이상학 수업에서 매번 3시간 이상의 넉넉한 답안 작성 시간을 주고 오픈 북 형식으로 이런 시험을 반드시 치른다고 합니다. 시험지에는 단 한 문제만 주어집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큰 시험지 상단에 덩그러니 한 문제만 보이고

시험지 하단에는 이런 단서가 붙어 있았다고 합니다.

주의! 다음의 내용은 쓰면 안 됩니다.

나이, 가정환경, 목표, 취미, 종교적 지향성, 정치 성향, 고향, 수입,

살면서 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대체 뭘 쓰라고 하는 거야? 학생들은 당황할 것입니다. 아마도 근본적인 자아를 찾게 하려는 교수의 뜻이 숨어있었을 것입니다. 나도 시험 삼아 작성해보려고 했지만 오래된 습관은 쉽게 답안지를 채우기 힘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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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쩌면 우주 속에서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고, 나는 지상의 인류라는 영장류 가운데 한반도 어딘가에서 77억 분의 1의 존재로 숨 쉬고 있습니다. 늘 좀 더 나아지려고는 하지만 때로는 삶에 지치고 스트레스도 받아서 알코올 같은 성분을 찾기도 합니다.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77억 개의 개체들은 대부분 큰 틀에서는 유사할 것입니다. 가끔 다른 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게 주제넘은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짐도 남들과 비교해보지만 스스로 아무리 크게 느껴도 우주적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도토리 키재기 수준일 겁니다.

...


시험지에 이런 내용들을 쓰면 낙제점을 받지는 않겠지요. 답안이 허전하면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를 한 수 적어놓고 나오면 어떨까요. 시인이 인생의 힘든 시기를 보내며 감옥에서 쓴 시인데 제법 알려진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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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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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인용하고 이런 말을 덧붙이면 아마 점수가 내려가진 않을 듯합니다.


교수님. 가장 훌륭한 답안은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생이라는 빈 답안지이자 캔버스를 채우기 위해 저는 아직 부족하지만,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물감은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인생을 멋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시고 격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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