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꾸러미다. 많은 경우 영화의 시나리오나 연극의 대본으로 각색된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처럼 비교적 선명한 이야기를 내포한 작품으로 '표제음악'의 영역을 설정하기도 한다. 회화에서도 종교의 스토리를 담은 성화가 있고, 무궁무진하게 상징과 은유의 내러티브를 표현한다. 때로 예술에서는 의미의 감옥에서 나와 다양한 관점에서 느끼도록 수용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창작자는 자신에게 작품의 의도를 물었을 때 어떤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어야 할 것이다. 종종 자신도 모르는 암호를 해독하라고 수용자에게 권유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있다. 더러는 많은 이들과 교감하고 난 후 대가의 경지에 올라 물음표와도 같은 특정한 작품을 수수께끼로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개의 작가들은 진지하거나 가벼운 자신의 관점, 설명할 수 있는 뭔가를 가지지 않으면 직업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
갤러리스트도 대개는 작가에게 컬렉터가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설사 정교한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막연하지 않은 창작의 동기나 작품의 개념을 요구한다. 그랬을 때 그냥 붓이 가는 대로 내가 즐거웠거나 우울한 마음의 행로를 그렸다고 한다면 어떨까. 아마 많은 전작으로 대중들이나 컬렉터와 교감한 경우라면, 그 '무심'의 세계를 이해시킬 수도 있을 것이고 특별한 작품으로 대접받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공감을 얻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의 삶은 거대한 스토리다. 예술 또한 작가의 생각이 담긴 무수한 내러티브와 스토리를 어떻게 대중들의 마음과 연결시킬지의 문제가 아닐까. 고독의 심연에서 그저 자신에게만 즐거움이나 위로가 되었다면 그만이라고 하는 취미의 영역이라면 다른 경우다. 그렇지만 수용자와 교감하는 예술품을 만드는 작가라면 자신의 관점이나 해석의 도구는 준비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우리 인생도 때로 해석을 요구받는다. 그저 먹고사느라 삶의 목적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왔고 또 내일도 그저 먹고살려고 달려갈 것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호의적으로 보면 겸손이라 하겠지만, 후손들에겐 다소 불친절한 답이 될 것이다. 작가이자 철학자 부르노 베텔하임의 오래전 말을 망구엘의 책에서 재인용해본다.
어린이들은 <크고 나쁜 늑대>나 <빨간 모자>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것은 내러티브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피를 흘리거나 뼈가 부러진 캐릭터가 아니라 스토리다.
- 알베르토 망구엘 저, 양병찬 역
<은유가 된 독자> p.133
어린이들이 옛이야기에 매료되듯이 예술품에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를 생각하는 것 또한 작품의 매력을 더하고 대중과 소통하려는 작가의 몫이 아닐까.
세끼를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하다 영원히 잠들었다는 것이 인간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누구와 어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이를 사랑했는지에 따라 작품이 되는 인생과 소음이 되는 인생은 천양지차로 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