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 해석

변주의 한계와 묘미

by 호림

공부의 구조는 대개 택스트와 해석이다.


마흔에 읽는 논어가 있고

쉰 살에 읽는 니체가 있다.

때로는 거장의 해석서 만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


학자들은 하나의 텍스트를 남기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대개는 아류에 그친다.

아예 그런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저냥 텍스트를 소개하며

사는 이가 대부분이다.


지식과 정보의 양이

과거의 텍스트를 남긴 시대의

거인들과는 판이하기에

무조건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따른다.

과거의 것을 재창조에 가깝게 해석하고

새로운 시대에 응용하려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에서도 거장의 작품에 대한

변주와 모작,

비틀어보기 같은 다양한 시도들이

원전 텍스트를 닮았지만

시대에 맞게

또 다른 의미를 찾아주어서

대중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도

바흐나 하이든이 남긴 유산을

더 발전시킨 경우이지만

고전음악의 영토를 넓히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안내했다.

피카소는 폴 세잔을 존경했고

다양한 화가의 화풍을 모방하다

아프리카나 다른 이방의 예술에서도

영감을 얻었고

마침내는 자기만의 것으로 그것을 훔쳤다.


그저 그런 예술가나 학자로

선대나 동시대의 거장을 흉내 내는 일을

목표로 삼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베토벤이나 피카소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악마성을 가진 바이올린 천재,

파가니니의 선율 또한 무수한 변주가

색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변주를 들으면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자신 만의 텍스트를 만들까?

또는 텍스트가 될 정도의

변주를 만들 것인가?

이런 고민조차 없다면

그 삶은 발전이 없을지도 모른다.



라흐마니노프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Op. 43 (Pf. 이진상)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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