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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Sep 21. 2023

메두사호의 뗏목

한 편의 그림은 순간에 많은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다룬 역사화의 경우는 그 시대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속성을 이해할 때 풍부한 해석의 지평을 열고 감상의 묘미를 더할 수 있다.


미국 초등학교 교실에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위싱턴>보다 익숙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이순신장군처럼 미국인의 가슴에 남아있는 영웅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과 사고를 다룬 하나의 작품이 포착한 것은 순간이지만 때로 작품의 생명력에 따라 영원을 담고 있다. 그러기에 캔버스에 구현된 세계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배경을 알면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여기 하나의 뗏목이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선구적 화가로 32세의 짧은 생에서 강렬한 그림 한 점을 남겼다. 그가 27세에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은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가로 716센티미터, 세로 490센티미터의 대작이다.


그림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1816년 7월 아프리카 해안에서 프랑스 해군 함정 '메두사' (Méduse)호가 조난당했다. 이 그림은 이후 뗏목에 의지하여 생존한 선원들의 참담한 모습을 담았다. 이 그림은 당시 해군을 비롯한 정부의 부패와 조난시 대피 과정에서의 하급 선원에 대한 차별적, 비인도적 대우 등으로 격심한 정치적 논란을 야기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적인 찬사와 함께 한편으로는 국가적 스캔들을 재차 부추긴 그림이라는 비난을 감당해야 했던 제리코는 1820년 영국으로 가서 그림을 전시했고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제리코는 이후 2년간 영국에 체재했고 그의 그림들은 영국 왕립아카데미(Royal Academy)에 전시되어 영국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메두사호의 뗏목 (The raft of the Medusa, 1818-19)



파리 살롱전에 출품할 때 이 그림의 제목은 단순히 "항해 조난 장면" (Scène d’un naufrage)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메두사호의 조난을 그렸음을 알 정도로 3년 전 일어난 비극적 사건은 프랑스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1816년 7월 프랑스 식민지 세네갈로 항해하던 배 메두사호가 암초에 부딪혀, 난파돠었다. 400명의 승객 중 다수는 구명보트를 탈 수 있었으나, 147명은 임시로 급조한 뗏목을 타야 했다. 구명보트는 밧줄로 이어진 뗏목을 끌고 가기로 계획되었으나, 뗏목의 무게로 인해 예인이 어려웠으며, 배의 전복을 우려한 구명보트 선원들은 연결 밧줄을 끊어버렸고 뗏목에 남은 사람들은 비참한 상황에 빠졌다. 13일의 표류 기간 동안, 수십 명은 해류에 휩쓸려 죽었고, 일부는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다가 살해되었다.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일부 부상자들은 바다에 던져졌고, 일부는 인육을 먹으며 생존했다. 13일 후 뗏목이 지나가던 범선에 발견되어 구조될 때 단지 15명만 살아 있었으며, 그중 5명은 건강 악화로 수일 내에 죽었다. 사건 진상 조사에서 메두사호의 선장은 실력이 아닌  연줄에 의해 임명되었음이 밝혀졌고, 무능하고 무모한 항해, 승객 구조를 하기 전에 선박을 조기에 포기하고 탈출한 죄목으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예상과 달리 3년 형을 선고받음으로써 나폴레옹 실각 이후 복귀한 왕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낳았다. 이후 사건은 프랑스의 국가적 스캔들이 되었으며, 제리코의 그림은 다시 한번 이 사건을 부각함으로써, 정부와 사건을 덮으려는 세력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메두사호를 그리기 시작한 제리코는 사건에 대해 상세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하였으며, 많은 예비적 스케치를 그렸다. 생존자 두 명을 면담하여, 뗏목의 정확한 모델을 만들었으며, 병원과 시체 안치실을 방문하여, 죽어가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피부 상태와 색깔 등을 직접 검사하였다. 뗏목 위의 흑인들을 그리기 위해 하이티 흑인을 모델로 고용했다. 제리코는 적극적인 노예 해방론자였다. 1819년 파리 살롱전에 전시되었을 때 이 그림은 열광적인 찬사와 함께 한편으로는 국가적 스캔들에 편승한 그림으로 비난을 받았다. 이후 영국 전시를 거친 이 그림은 당시 제리코에게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주었으며, 현재 프랑스 회화사에서 낭만주의를 여는 가장 중요한 그림의 하나로 남았다.


이 그림은 주제 선정과 극적인 표현 방식에 있어서 역사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화면에서의 감동이 즉각적으로 마음에 와닿게, 강렬하고 격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의 주류인 신고전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평온한 질서와는 확연히 구분되며, 낭만주의를 여는 기념비적인 그림으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이 그림은 또한 들라크루아, 터너, 쿠르베, 마네 같은 여러 후세 화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예술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후세에 많은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리더의 맨얼굴은 언제나 위기에서 보인다.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무림 속에서도 냉철한 판단으로 부하들을 살려낸 선장도 있고 책임을 피하기 급급한 사람도 있다.


세계 탐험사에서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름은 빛난다. 그가 극지를 정복해서가 아니다. 조난당한 배에서 선원 전원을 무사히 생환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섀클턴의 < 위대한 항해 >다시 읽으며 남극의 서늘함으로 체온을 떨어뜨렸고 리더의 길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어니스트 섀클턴이라는 위대한 탐험가가 선원들을 이끌고 함악한 자연과 사투를 벌이며 지략을 발휘해 전원 생존해 귀환한 이야기는 자연을 정복한 스토리 이상으로 감동적이었다. 섀클턴의 이야기를 메두사호에 대입하면 상황논리를 거두절미한 것으로 무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위기는 언제나 위대한 선장의 존재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섀클턴의 남극은 이제 온난화의 영향으로 지구의 눈물처럼 빙하가 흘러내리고 있다. 우리는 어쩌면 지구호라는 뗏목에 위태롭게 기대어 살고 있다. 인육을 뜯어먹으며 살아남을 궁리를 한 당시 뗏목 위의 사람들보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인류는 상생의 묘안을 찾고 지속가능한 지구를 생각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일까. 우크라이나의 총성이나 곳곳에서 벌어지는 환경파괴의 뉴스들은 결코 희망적인 답을 주지 않고 있다.


200여 년 전의 메두사호를 좁게 저출산, 저성장의 늪에서 힘겨운 항해를 펼치는 대한민국으로 치환하면 어떨까. 기업인들에겐 치열하게 산업의 활력과 미래를 고민하기에 늘 시간이 부족하다. 절박한 생존경쟁에 나선 기업들의 시계는 너무나 빠르게 돓아가고 있는 것이다.    


느리게 돌아가거나 거꾸로 가기도 하는 정치권의 시계소리가 들리는 TV뉴스보다 클래식 음악에 귀를 맡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47) HAPPY MORNING MUSIC - Powerful Wake Up & Positive Energy - Embrace Happiness With Soft Morning Music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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