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고위직을 맡으신 분이다. 연배가 한참 위지만 늘 격의 없이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소탈한 모습으로 담담하게 들려준다.
가을 햇볕이 따사로운 날 이 분은 준비된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자신의 인생에서 청춘의 한 페이지를 떼어내 회고한다.
정말 고비가 많았다. 용감하게 선진국에 공부하러 갔지만 집안도 기울고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등록금 납입기일을 미루다 미루다 학교에서 퇴교조치한다고 예고한 날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저기 장학금을 알아봐도 문턱은 높았다. 귀국할 준비를 하면서 짐 정리를 할 때 연립주택의 아래층 대학생이 여느 때처럼 올라와서 한국의 가난한 유학생 형에게 대화를 청한다. 그날따라 표정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그 친구는 사정을 듣고 왜 이런 기회를 날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느냐며 방법을 찾아보자고 한다.
다음날 그 파란 눈의 동생은 자신도 대학 입학 전 학비를 공사판에서 벌었기에 너무나 돈의 소중함을 안다. 내겐 아직 잔고가 조금 남아있다. 그 돈으로 급한 등록금을 납부하고 형이 나중에 갚으라고 한다.
당신이 날 뭘 믿고 그러느냐고 반문하자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대학원 다니는 형의 성실한 생활태도를 보고 항상 배웠다. 자신은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배웠다며 대학교 1학년생 답지 않은 말로 자신의 눈물샘을 자극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궁핍한 생활을 눈치채고 꼬깃꼬깃하게 접은 달러를 던져놓고 간 동료 유학생 후배도 있었다.
형편이 펴서 이들에게 10년 20년이 지나 이자까지 후하게 계산해 그 돈을 갚았다. 동료 유학생으로 같은 배를 탔지만 정말 없는 돈에 자신을 위해 콩 한쪽을 기꺼이 나눠먹은 친구는 20여 년이 지나 수소문해서 찾았다. 생각 외로 형편이 좋지 않아 마음이 아팠고 아마도 자신이 받았던 돈의 100배 이상을 전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회상했다고 한다.
이 분은 자신은 인생이 예순을 훌쩍 넘기고 돌아보니까 야망으로 불타던 시절 넘어지고 좌절한 순간에 자신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라며 회고한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인생의 결을 다듬고 고마운 사람에게 인사를 다할까를 고민할 나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 여전한 형안을 반짝이며 주말에는 봉사활동에 재미를 붙여 바쁘기도 하고 할 일이 너무 많아 즐겁다고 하며 동참을 요청하기도 한다. 자신은 낙도나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논술지도를 하고 있는데 대단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배웅할 때 뒷모습을 비추는 햇살에 희끗희끗한 머리가 빛났다. 생의 가을은 저절로 오고 어쩔 수 없는 낙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체념은 찾을 수 없는 분이다.
끝까지 삶의 행로를 주도적으로 찾고 가꾸어가는 모습에서 인생을 예술로 만들어가는 신사의 품격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