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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Dec 25. 2023

어느 예술가의 초상

박수소리가 부담스러웠고 자신의 연주를 절대 정숙의 공간에서 주목하지 말고 잡답을 하며 들으라고 부추긴 이가 있다. 음악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있는지도 모르게 스며드는 것이라며 보조재로 남을 자신의 작품이 주인공이 되는 걸 한사코 반대했던 음악가였다. SNS나 온갖 수단으로 주목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세태를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예술가가 있었다.  


화가와 짧은 동거가 연애의 전부이다시피 했던 이 독신의 단벌 신사는 몽마르트르와 카페를 배회한 작곡가였다. 어쩌면 순수한 예술가의 초상 하나를 여기 신부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하면서 천주교에 귀의한 작곡가에서도 발견할 수도 있다.


짐노페디의 의미는 고대 스파르타에서 어린이나 청년들이 나체로 춤을 추는 의식에서 유래했는데 그의 작품의 제목으로 차용했다. 스파르타 같은 금옥지향적인 세상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세상을 하나의 이상향 같은 것으로 설정했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짐노페디스트라고 부르기도 한 에릭 사티는 작품의 제목으로 짐노페디 연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금은 잔잔하게 정서를 파고드는 힘이 대단한 음악으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악이다.


한 때의 연인 수잔 발라동은 사교계의 스타로 주목받았다. 정작 자신은 이제 쓸쓸히 보이지 않는 무대 뒤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가구음악' 연주자다. 이런 사티의 삶 또한 예술의 모습일 수 있다.

   

어느 가난한 교회의 목사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그늘도 짙다고 하면서 원래 예수의 정신은 가난한 동네에서 작은 교회로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형교회가 버스로 신도를 실어 나르면 모습은 마치 대형마트를 연상케 하고 자신의 교회는 골목의 작은 상점처럼 목회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고 한다.


성전을 높이 쌓을 헌금보다는 그저 가난한 어깨를 서로 기대게 만드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요란하지 않게 자신의 목회를 가난한 구석 어딘가에서 하는 게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 목사의 말은 마치 사티의 음악처럼 느껴졌다. 지저스는 어쩌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동네에 스며들듯 와서 그들을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그 고향 베들레헴에는 총성이 멈추지 않아서 예년 같은 성탄 축제는 엄두고 못 내고 있다는 안타까운 외신도 들린다.

 

에릭 사티는 낭인처럼 살다 자신을 보러 온 신부에게 영성체를 요청하고 카톨릭 신자가 되어 생을 마감했다.

요란하고 경쾌한 캐롤 대신 스며들듯 마음에 들어오는 <짐노페디>가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어울린다. 소리없이 내리는 눈처럼.


Erik SATIE - Gymnopedies 1, 2, 3  (60 min)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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