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딜리버 리 Mar 27. 2024

뜨거운 건 식혀야지

소공녀가 포기할 수 없는 것

요즘은 에스프레소로 추출하는 커피머신이 당연하지만 30여 년 전엔 드립 방식의 커피 메이커를 사용했다. 원두가루 붓고 물 채우면 물이 떨어지는 드립 방식으로 온열 기능이 있어 시간이 지나도 향이 사라진 미지근한 카페인을 마실 수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헤이즐넛 커피를 내리면 사무실 전체로 향이 퍼지는데, 그 향이 달콤했다. 헤이즐넛 커피가 유통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원두에 헤이즐넛 인공 향을 입힌 것이란 건 한참 뒤에 알게 됐다. 어쩐지 향에 비해 맛이 없다 싶었다.


직장과 거처를 옮기며 맥심 2:2:2 타먹는 커피와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뭐 별꺼라고! 우연찮게 삼청동에서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를 접하고 커피맛을 알게 되었다. 지금껏 내가 알던 커피맛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지리산 자락으로 옮긴 후엔 커피 마실 곳이 마땅찮아 드립 커피를 직접 내렸다. 처음엔 볶은 콩을 사서 마시다 직접 볶아볼까 싶어 프라이팬으로 시작해서 소형 도기, 열풍 방식, 전기 회전 방식, 직화 방식 등을 거쳐 지금은 뚝배기 로스팅을 하고 있다. 지금껏 사용한 방식 중에 노동 투입 대비 만족도가 제일 높다.


대도시 원룸으로 옮긴 후 수입이 몇 달 없는 주제에 드립 커피는 언감생심, 전기 포트만 있으면 마실 수 있는 믹스 봉지커피를 한동안 먹었다. 월급쟁이 택배족으로 일정 수입이 생기면서 핸드 드립에 필요한 최소 도구를 갖췄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일당은 그대로여도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듯.


좁은 원룸에서 커피콩을 볶을 엄두가 나지 않아 한 달에 2번 정도 볶은 콩을 주문했다. 갚을 돈이 여전하고 그 돈이 빠져나가면 빠듯하지만 이 정도 호사는 누리고 싶었다. 볶은 콩 200g에 싼 게 7,000원 수준인데, 생두는 1kg에 1만 원, 20분 정도의 수고로 몇 배나 싸게 돈도 아끼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볶은 정도로 마시고 싶었다.


2년여 만에 자가 로스팅을 하면서 어디에 볶을까 찾다가 뚝배기가 눈에 띄었다. 보온 능력이 있으니 열 전도율도 괜찮지 않을까? 생두를 넣고 장미목 긴 스푼으로 처음엔 강불, 노릇해지면 중불, 갈색으로 변하면 약불로 손목이 안 아플 정도로 쉼 없이 천천히 저어준다. 타닥타닥 1차 크랙에 이어 타다닥 타다닥 2차 크랙이 시작되면 색깔과 연기에 집중한다. 연기가 많아지고 색깔이 짙어지면 불을 꺼고, 남은 열에 휘젓다가 원하는 색깔이 되면 철망 소쿠리에 붓고 재와 껍질을 제거하고, 신문지 위에 펼치고 식힌다. 신문지 위에서 달궈진 콩이 식어간다. 열기가 식은 콩을 갈고 물을 흘리면 커피 향이 퍼진다. 열기가 식어야 제대로 보이는 건 사랑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커피 맛에 과일향이 나고 자란 땅의 냄새가 있다는 둥 온갖 수식어를 쓰지만 커피맛은 기본적으로 쓰고, 카페인은 중독이다. 이 사실은 변함없다. 커피는 맛보다 향을 먼저 마시는데, 카페인의 각성 효과 때문에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자는 S도 커피 향은 좋아했다. 커피콩을 갈고 드립하고 있으면 커피 향을 쫓아오던 S(는 비염인데 냄새는 어떻게 그렇게 잘 맡을까?), 당신은 간혹 커피 향을 맡고 있나요?


봄을 재촉하는 비가 커피콩 볶듯 투둑투둑 창을 두드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휴무일엔 파스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