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지 아파트가 배송구역인 날에는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에 하루 종일 머문다. 동선이 가장 짧게 나오는 순서로, 각 라인 입구에 주차하고 물건 챙겨서 엘베 앞으로 간다. 동은 바뀌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고객님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 몸은 편한데 재미가 없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싼다더니 시장과 골목길로 배송 간 동료도 있는데 몸 편해지니 재미 운운하고 자빠졌다. 육체노동에 몸 편한 것보다 좋은 게 어딨다고!
엘베 문 열리면 한쪽 발 내밀고 슬라이딩으로 문 앞에 물건 두고, 사진 찍고, 닫힘 버튼 누르고, 3초 정도 걸린다. 배송시간을 1초라도 줄이려는 택배족에게 엘베 옆으로 한 집씩 있는 구조가 딱 좋다.
엘베 잡고 배송하지 말라는 경고문구를 보는데, 복도식 아닌 아파트에서 엘베 잡고 배송하는 택배족은 완전 초보 또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다. 3초면 되는데 시간 더 걸리게 잡고 칠리가 있나? 여러 집 배송 끝내고 1층 도착하면 엘베 전세 냈냐며 온갖 성질을 부리는 당신을 만날 때가 있다. 한참 기다린 당신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엘베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 나누는 아래윗집 사는 당신의 이웃들이 많이 시켜서 그런 걸 어쩌겠는가? 1집 배송하고 1층 내려왔다, 다시 다음 집 배송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공동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면 이런 일도 없고 좋을 텐데, 그건 돈이 따로 들어서 그런가 할 생각을 안 하네.
참고로 복도식 아파트는 애초부터 엘베를 잡고치면 시간이 무한정 걸려서 중간중간 물건 내려두고, 위층부터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배송하는 게 시간이 단축되니 굳이 잡고 칠 필요가 없다.
간혹 오래된 아파트의 경우 엘베 문이 지나치게 빨리 닫히는 곳이 있다. 3초 컷의 택배족이 신경 쓰일 정도로 엘베 문이 빨리 닫히는 수준이면 동작이 굼뜬 노인들과 순간 몰입도가 높은 어린이들에게 분명 위험요소다. 그래도 여전히 그대로인걸 보면 엘베 작동시간에 자신들을 맞추나 보다. 인간 편하려고 만든 기계에 인간이 맞추는 꼴이라니!
대단지 아파트 배송하는 어느 날, 16층 배송 끝내고 엘베 타고 내려오는데 12층에서 중년 남녀 5명이 탄다. 여기 사는 지인집에 들렀다 같이 외출하는 것 같다. 1층에 도착하자,
-와 벌씨로?
-빠르네
-롯데잖아
(뭔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있는데)
-그러게
-그래도 롯데잖아
-(다 같이) 하하하~
롯데랑 엘베 빠른 게 뭔 연관인가 싶은데, 브랜드 아파트가 좋다는 걸 엘베 속도로 얘기하는 거로 이해했다.
동년배로 보이는 남녀님들~ 엘베 빨라서 당신 삶이 나아진 게 있나요? 몸의 반응이 점점 느려지는 나이대로 접어들었잖아요. 몸이 느려진 건 생각을 그만큼 하란 거 아닐까요? 언제까지 몸의 빠르기만 쫒을 순 없잖아요.
당일 배송인데도 빠른 배송을 고객 요청사항에 적는 전설의 빨리빨리족들이 사는 동네인 만큼 빠르기는 경쟁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데 그렇게 좋아하는 속도, 그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인생은 괜찮을까?
적당하자, 적정하자, 적절하자.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으로, 그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철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키가 길면 그만큼 잘라내고, 침대보다 짧으면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늘여서 죽였단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은 아테나의 영웅인 테세우스에 의해 끝난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서 침대에 누이고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내어 처치했단다. #그리스_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