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인식해야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슬픔을_공부하는_슬픔 #신형철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햐아~ 부재에 따른 결핍으로 생긴 슬픔인걸 알지만, 내가 왜 이런 지 더 알고 싶으면 찾아보는 수밖에, 슬픔마저도 공부해야 하나 싶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제공한 원인으로 타인이 슬픔과 고통을 받는다. 그 사실이 불편해서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존재하는 한 나의 불편은 사라지지 않으므로 새롭게 사실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의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오히려 타인 때문에 일어난 일로 둔갑하게 된다. 그렇게까지 해서 나는 편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