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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리버 리 Aug 02. 2024

몸은 기억한다

택배족에게 배송하기 좋은 날이 있을까마는 굳이 찾으라면 선선한 늦가을이 아닐까 싶다. 시야 가려서 운전하기 불편하고, 길이 미끄러워서 넘어지기 쉽고, 온몸이 젖고 발이 허옇게 퉁퉁 부는 비 오는 날을 택배족은 싫어한다. 올해 역대급으로 비가 쏟아지는 장마가 온다더니, 웬걸 역대급으로 불볕더위가 계속된다. 물건 적재하면서 흘린 땀으로 작업복에서 쉰내가 폴폴 난다. 살짝 팔만 들어도 쉰내가 풍기며 하루 종일 나의 후각을 괴롭힌다. 이렇게 불볕더위가 계속될 땐 비라도 퍼붓었으면 싶다. 더워도 너무 덥다.


그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그칠 기미가 없었다. 퍼붓듯 쏘아대는 요란한 비 소리를 들으며 물건을 적재했다. 이렇게 비가 퍼붓는 날에는 평소보다 배송속도가 느려지지만  어찌 되겠지 하고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 집이었다. 언제나 빠지지 않고 주문하는 단골 고객님 집은 공용주차장 뒤편이다. 주차장 끝나는 지점에 하수도 철제 덮개가 있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철제 덮개를 밟는 순간 미끌~ 꽈당. 보도와 차도 구분하는 시멘트턱에 오른쪽 눈 옆을 부딪쳤고 오른쪽 무릎 근처가 까졌다.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께서 괜찮냐, 여기 자주 넘어진다며 걱정 어린 말을 하신다. 괜찮아요 하고 일어서는데,

-잠깐만! 피가 많이 나는데...

-네?

순간 뜨뜻한 액체가 눈가 주위를 타고 흐른다. 핸드폰 카메라로 얼굴을 비췄더니 굵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밴드라도 부쳐야겠네, 00아~ 밴드 쫌 갖고온나

바로 옆이 집이라 목청을 키워 딸을 부른다.

-허어~ 오늘 일진 사납네요

피가 뚝뚝 떨어지자 자신의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밴드라도 부치마 쪼매 낫겠지

어느새, 하얀 손수건은 벌겋게 피로 물들었다.

-아이고~ 손수건을 우째야…

-괜찮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마이 찢어진 것 같은데, 꼭 병원 가요

-네

이렇게 일진 더럽게 사나운 날, 마음 씀씀이가 일진인 분을 만난 덕분에 몸의 상처를 그나마 위로받았다. 눈 옆에 피가 많이 나서 신경을 못썼는데, 오른쪽 무릎도 제법 까여서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약국에 들러 항생제 첨가된 밴드를 붙이고 꾸역꾸역 배송 끝냈다. 10여 일 지나니 상처는 그럭저럭 아물었고 그나마 다행인 건 눈썹에 가려서 흉터가 잘 보이지 않지만 기억은 여전하다.


이제 배송구역 바뀌어서 그 집 앞을 지날 일이 없건만 하수도 철제 덮개는 골목 어디에나 있다. 비가 오든 아니든 이 놈을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멈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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