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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의 여행자

by 딜리버 리

무신론자에 기도는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어딜 가든 성당과 교회, 사찰을 눈으로 찾아다니면서 산과 바다, 강, 동굴 같은 자연이 주요 관광자원인 곳에서 직접 체험을 안 하고, 눈으로만 둘러보는 행태를 폄하했었다. 역사와 종교, 예술에 교양을 갖춘 듯 허세를 부렸고, 여전히 부리는 꼴이 부끄럽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굳어진 편견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 된다.


머물고 있는 데친역 앞 케이하우스 주인장 K님이 Labe-Elbe 교통패스로 데친-테플리체-알텐베르그-쾨니히슈타인-바드산다우-데친 코스를 추천해 줬다. 체코를 출발해 독일로 해서 체코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하루에 가능하다.


카를로비바리 보다 덜 유명하지만 테플리체 역시 온천도시다. 카를로비바리가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곳이라면 테플리체는 체코 북부와 독일 작센주 등지에 사는 주민들이 찾는 곳이라고 할까? 데친에서 멀지 않아 작년 체코 여행을 준비할 때 무릎 안 좋은 S와 몇 번 오려고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되던가? 마음의 짐처럼 남아있던 여행이라 혼자 오게 되었다.


데친역에서 기차 타고 테플리체 도착, 베토벤이 들렀다는 온천탕으로 갔다. 음치, 박치에 듣는 귀가 없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을 구분 못하지만 누구나 들으면 아~ 하는 ‘빠빠빠~ 빤’으로 시작되는 도입부, 그 인연이 어딘가?


온천탕 건물엔 베. 토. 벤, 상호가 큰직하니 걸려있다. 구경할 수 있냐니 괜찮단다. 2층 오르는 계단부터 상당히 고풍스러운게 과거 부자의 대저택인가 싶은데 목욕탕 특유의 냄새와 개인실로 보이는 방들이 복도에 쭉 늘어서 있다. 로비엔 떨어지는 물방울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형물이 지나치게 과하게 주렁주렁 달려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데 감정, 글쓰기처럼 장식도 마찬가진 듯하다. 뭐든 적당해야 한다.


겨울비 추적대는 날씨가 계속인 데다 에상보다 가격이 비싸지 않아 이쪽 온천은 어떤 식일지 궁금한데, 온천물에 혼자 몸 담글 마음이 없다. 여행은 어디로 떠나는 거지만 누구랑 가는지에 따라 여행의 형태는 변화되는 듯 하다. 어딜 가도 비슷하지만 12월 체코 소도시는 인적이 드물다. 고즈넉한 중세풍의 시내를 한 바퀴 구경한 후에 알텐베르그행 버스를 타러 갔다.


스키 장비를 손에 들고 버스를 타는 것도 신기하고, 삼삼오오의 등산복 차림 등으로 짐작할 때 곧 도착할 독일 알텐베르그는 겨울 스포츠가 활성화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내를 벗어나 산길을 오르는데 어느 시점부터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설국이 펼쳐진다. 저 아래 테플리체는 겨울에도 푸르른데, 실제론 고도가 높은데 못 느꼈나 싶어 스마트폰으로 확인했더니 700m 정도다. 이렇게 풍광이 다르다니, 이거 뭐지? 싶은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엄청나다.(나중에 찾아보니 그리 높지 않은 그 산으로 인해 기후가 달라서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한다) 점심 먹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세찬 바람 덕에 따뜻한 커피가 간절했고, 다음 기차까지 시간이 제법 남아서 관광안내소에 문의, 알려준 식당으로 갔다. 길을 걷다보면 한 눈에 띄일 거라는데, 어딘거야? 싶은데 아~ 이 집이겠구나 싶다. 바로 옆에 스키장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떤 행사를 준비하는 듯 여러 사람이 모여있고 뭔가를 만들고 있다. 장독으로 내외부를 치장한 식당을 한국에서 간혹 봤는데, 이 집은 도자기로 만든 주전자와 컵을 빼곡하게 주렁주렁~ 동서양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한 취향이 있고, 취향은 DNA와 시간이 만든 고유성이니 나와 달라도 타인의 취향은 인정할 밖에. 추운 데서 몸을 녹인 것으로 충분하다. 하이데나우까지 기차로 내려와서 쾨니히슈타인 요새로 갔다.


성이 아니라 요새라는 걸로 봐서는 큰 규모는 아닐 테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을 테니 전망은 좋겠다 싶었다. 요새까지 운행하는 잠깐 타는 셔틀버스 7.5유로, 입장료 15유로, 이 돈을 내면서 볼 게 있을까?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볼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지불했다. 지금도 거리를 감안하면 셔틀버스 요금은 독점이라 가능한 가격이다. 1개월 49유로 철도요금처럼 대중교통 요금정책을 만드는 독일에서 이런 폭리가 가능하다니!


암반 위에 우뚝 솟은 데친성을 처음 봤을 때 우와~ 싶었는데, 쾨니히슈타인은 데친성의 규모를 훌쩍 넘는 상상 그 이상이다. 우와와와와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떻게, 왜, 이거 뭐지? 싶다.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100여 미터가 넘게 암반을 뚫고 만든 우물이 20세기 중반까지 사용됐던 쾨니히슈타인은 성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거대한 암반 위에 건설한 작은 도시였다.


규모가 커서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는데도 시간이 모자라 내부를 다 보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엘베강을 끼고 저무는 노을이 어쩜 저리 고운 색깔을 뽐낼까? 겨울이 아니면 이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듯하다. #쾨니히슈타인, 인간과 자연이 만든 대단한 공간이다.


하룻만에 서울 오갈 수 있는 1일 교통권 시대가 열렸다며 국가가 국민에게 자랑질하며 자부심 가지라던 시절이 있었다. 국경 구분이 굳이 필요할까 싶은 두 국가의 변경도시들을 하루 만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동안 땅덩어리가 작은 데다 분단국가라 가능했던 그 시절의 자랑과 자부심, 국가와 국민이 안쓰러워졌다. 오죽 내세울 게 없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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