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사랑하거나,
아예 사랑한 적이 없었거나
회사가 이전하고 9개월 만에 또 이전하는 바람에 감천동에 새로 구한 집이 어이가 없어졌다. 또 이사 가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조용한 주택가에 뒷산이 있어 아침마다 새소리가 들려오고, 인근에 마트가 있어서 마음에 드는 데다, 이전할 회사 근처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 생각을 접었다. 더구나 비만 안 오면 타고 다닐 오도방도 있으니까!
회사 이전하고 배송업무가 주 2~3회로 줄었다. 동료들끼리 편하다, 살쪘다는 얘기를 하면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기가 얼마나 갈까 하는 소망(오랫동안 계속되길 바라며!) 담긴 걱정을 하며 퇴근을 기다리던 어느 날,
-행님, 올해는 여름이 늦은 것 같지요?
-그러게. 봄이 기네. 작년 일지를 보니 4월 중순부터 반바지에 반팔 착용했던데
-올해 여름은 얼마나 더울라꼬 이리 늦는고
-그 더위가 와도 우짤 수가 없잖아. 그냥 지금의 봄을 즐겨
-작년보다 덥겠지요?
-그래도 평균적으론 작년보단 덜 덥겠지
-와요?
-배송 횟수가 줄었으니까, 배송할 때는 웬만한 날씨에도 땀이 줄줄 흐르잖아
-그렇네요. 이 좋은 시절이 얼마나 갈라나?
-그것도 우리가 우짤 수 없는 일이잖아. 지금 이 시기를 즐겨
-그렇네
아직, 여름이 오지 않아서인지 비가 그치자 날씨가 쌀쌀해졌다. 비가 그치자 산안개가 피어오른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전, 울긋불긋한 색깔이 산을 물들이듯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기 전에도 한 가지가 아닌 세상 모든 잎들이 온 산을 파릇파릇 물들인다. S는 이 시기의 파릇파릇함 좋아했다. 그가 알려주기 전까진 녹색은 하나였는데, 이후로 여름으로 넘어가기 전 온갖 종류의 녹색으로 물들인 풍경이 보였고 좋아하게 됐다. 어떤 걸 좋아하는 건 순간의 감정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한 건 나의 취향과 맞아야 가능하다. 아직은 온갖 종류의 초록초록인 세상이다. 지금을 즐기자.
몇 년 전부터 감정 기복이 잦고 새벽에 깨고, 소변이 자주 마렵고 등등 그랬다. 여성에 비해 심하진 않아도 남성도 갱년기 증상이 있다더니, 새벽에 깨는 바람에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아서 다음 날 배송할 때 버거웠는데 1년 정도 그러다가 지금은 괜찮아졌다. 어쨌든 신체의 변화는 무난히 넘어간 것 같지만 감정은 그러지 않는 것 같다.
믿었던 사람에게 속은 감정은 끔찍한 기억일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괜찮아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어느 날 불쑥 떠오르면 먹먹함과 억울함에 가슴 한편에 돌이 들어앉은 듯 답답하고 호흡이 가빠지며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 자신이 버티기 위해, 살기 위해 그 감정을 숨기고 마음의 밑바닥에 밀어뒀을 뿐이다. 무난히 넘어간 몸의 변화와 다르게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 한 번씩 그 감정으로 몸서리를 치며 잠을 깰 때가 있다. 꿈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데, 꿈에서 받은 슬픔과 아픔이 그대로 전달되어 먹먹함과 억울함에 눈물을 흘린다. 아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2023년 4월~ 2025년 4월, 2년 정도 생각이 들어설 시공간을 줄이기 위해 대체휴무와 연차를 사용치 않고 택배를 계속하며 몸을 힘들게 했다. 사정 모르는 동료들은 나이도 있는데 그렇게 안 쉬고 배송하다가 몸 상한다지만 몸이 편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니 어쩔 수 없었다.
나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은 이들 역시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감정에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내가 저지른 과거의 배신으로 현재를 힘들게 지낼 그들에게 여전히 미안하고, 너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