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제일 오래한 직업

택배

by 딜리버 리
니들은 내일을 보고 살지.
나는 오늘만 보고 산다.
그게 얼마나 좆같은 건지 보여줄게.

2019년 12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S를 놓치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다. 2013년에 직장을 관뒀으니 경력단절 6년, 나이는 50대, 농사짓다가 다시 도시로 나왔는데 어떻게 먹고살 건지 대책이 없었지만 나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사업기획과 조직관리를 해본 경력으로 관련 분야에 구직 지원을 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간혹 친절한(?) 곳에선 해당 부서장 보다 나이가 많다며 난색을 표하는데 나 혼자 젊은 줄 착각하고 살아서인지 나이가 걸림돌이 될 거라 생각지 않았고, 실제 업무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음에도 정작 나만 몰랐던 것 같다. 화이트칼라를 포기하고 블루칼라로 눈을 돌리자 갈 곳은 많은데 주 6일은 기본이고, 임금은 최저시급 수준으로 박했다.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가족을 이런 수준으로 취급하는 회사가 얼마나 많은지,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워크넷을 비롯한 구인구직 사이트에 지천으로 넘쳐났다.


마침 이커머스 시장이 빠르게 성장 중이었고 운전면허만 있으면 되는, 지원절차가 너무 간단한 택배회사에 지원했고 채용됐다. 이름 뒤에 '님'만 붙이면 수평적이라 생각하는, 99.9% 남자들로만 득실대는 성비 불균형인 조직문화가 영 거슬렸다. 배송능력은 답보상태인데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매월 갚아야 할, 보내야 할 돈이 정해져 있으니 관둘 마음을 먹을 수 없었고, 힘들다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입사 동기들은 진작에 퇴사했고, 신입은 수시로 입사하고 하루 만에 관두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던 신입 몇 개월차에 허리를 다쳐 병원 치료받으며 이 일을 오래 할 수 없을 것 같아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지만 코로나19는 이미 만연했고 일자리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밥벌이가 그렇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만족하고, 예전엔 내가 뭐였는데 따위의 과거의 영광을 가지지 말자. 일이 힘들어 남에게 권할 직업은 아니지만 내 몸으로 벌어먹는 부끄럽지 않은, 할 수 있는 직업이다. 사무직도 마찬가지지만 택배는 몸이 특히 중요하므로 아침마다 목, 허리, 무릎, 손목 스트레칭에 팔굽혀펴기를 꾸준히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릎과 허리 보호대를 착용하는 동료들이 늘어나는데, 의외로 무릎 쑤시고, 허리 통증이 없어져서 차고 있던 보호대를 벗었다. 시간의 흐른 만큼 택배에 적합한 몸으로 적응했다.


몇 개월 만에 살이 많이 빠진 걸 알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느 휴무일에 외출하려고 작업복 아닌 청바지를 오랜만에 입는데 몸의 변화를 실감했다. 허리끈 구멍 제일 끝에 겨우 걸쳤는데 안쪽 끝에 채워도 여유가 있다. 바지가 너무 접혀서 모양이 빠져서 안쪽 2번째 구멍에 걸었다. -13kg, 살 빼고 싶은가? 택배를 추천한다.


떠올려보니 길어야 4년이 오래 일한 축에 든다. 어떤 일이든 2년 정도 지나면 익숙해지고, 해왔던 방식으로 한다. 그렇게 일과 직장에 익숙해지고 편해지면 재미가 없어지고 그래서 관두고, 전혀 다른 업종으로 갈아탔다. 그때마다 주변에선 '남들은 자리 잡히면 그 일이 안 맞다 싶어도 눌러앉는데, 별나다', '관둘 때 관두더라도 관련 업종이나 어딜 갈 건지 정하고 관두야지'하는 걱정과 우려를 보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근거 없는 낙천성을 가져서인지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의 일을 관둘 마음을 막진 못했다. 2020년 2월부터 2025년 6월까지 햇수로 6년, 지금껏 직업 중에 택배가 제일 오래되었다. 이 일을 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이 일을 하고 있고 정년까지 다니려고 한다. 택배 역시 어느 시점이 지나면 이동 동선이나 도로 사정, 건물구조 등이 익숙해지데, 그 익숙함을 미리 알 뿐 몸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금껏 머리 쓰는 게 체질인 줄 알았는데 실은 몸 쓰는 일이 나랑 맞는 것 같다.


일이든 관계든 미래에 어떻게 될지 걱정과 우려를 해봐야 소용없는 경우를 봤고 겪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걱정은 해서 무얼하나, 오늘, 하루 탈 없이 끝났으면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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