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소바
대마도는 면적의 90% 이상이 산이라 어딜 가더라도 산을 넘는 건 기본이고,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긴 해안선이 복잡한 리아스식 섬으로 산을 넘으면 웬 호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잔잔한 바다가 있다. 그래서 크고 작은 항구가 많은 듯한데 자전거 타기는 수월치 않은 지형이다.
300엔 깎아주기에 이틀로 빌려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라이딩은 계속된다. 히타카쯔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슈퍼마켓이 있고, 관광객들이 이것저것 많이 사간단다. 나는 살 게 없는데, 아니다! 며칠 전 회식 끝나고 동료집(에 엄마가 안 계셔서 가능)에서 맛난 양주(무려 5종)를 맛봤는데, 주세가 싼 일본이니 술을 사갈까? 슈퍼마켓이 있는 동네니 규모가 있을 테니 거길 둘러보고. 그렇게 목적지가 정해졌다. 출항시간 고려해도 오후 2시까지 돌아오면 된다. 지금 시각 08:20, 충분하다.
슈퍼마켓 직전 도로가에 신사가 있는데 사진을 찍고 보니 울창한 편백나무 숲 속을 한참 들어가야 있을 법하게 찍혔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 전후 설명 없는 사진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어허~ 왜 여기에 있을까 싶은데 딱 슈퍼마켓뿐이다. 어제 자전거를 몇 시간 탄 여파로 엉덩이가 벌써 당기는데 히타카츠로 돌아가도 할 게 없는데, 구글맵 검색하니 산을 하나 넘으면 소바집이 있다. 일본 본토보다 한국이 더 가까운 대마도지만 그래도 일본 아닌가? 일본하면 소바! 소바집으로 가자. 도착시각 9시. 햐~ 오늘 일정 꼬일라나? 11시부터 장사 시작이다. 소바집 근처 안내문에 1700년대에 여기로 왔던 조선통신사의 어떤 이가 고구마를 발견했고, 조선으로 가져가서 부산 영도에서 재배에 성공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단다. 역사적 위인을 꼽을 때 뛰어난 지략으로 적을 물리친 장군들과 태평성세를 이룬 왕,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발휘한 학자들이 오르내린다. 근데 사람 목숨보다 급하고 중한 일은 없다. 목화씨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겨울을 날 수 있었으며, 고구마 덕분에 조선 인민이 살았을 것이다. 문익점과 조신통신사 그 분이 진짜 위인 아닌가? 그들 덕분에 내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소바집 문은 굳게 닫혔고 2시간 뒤에 연다.
애초부터 한국 단체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꼭 들린다는 한국 전망대를 가볼 마음은 없었다. 지금껏 부산에서 대마도를 한 번도 못 봤는데 갑자기 한국이 보일 리가 있나 싶고, 설혹 보인다고 없던 애국심이 막 쏟는 것도 얼마나 웃긴가? 다시 구글맵으로 근처 검색! 산 2개 넘으면 해수욕장, 이국 전망대가 있다. 대마도에서 보이는 건 한국뿐일 텐데 왜 이국이라 했을까? 한때 여행업계 종사자로서 통빡을 굴려보니, 대부분의 한국 단체관광이 1박 2일 일정인데 이국 전망대는 히타카쯔에서 이즈하라 가는 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외딴곳이라 동선 짜기가 애매하다. 이즈하라에서 히타카쯔로 오면서 한국 전망대 들려서 애국심 뿜뿜 시키고, 온천과 미우다 해수욕장 눈팅 시키고, 히타카쯔항으로 오면 동선 짜기가 훨씬 수월해서 한국 전망대를 새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전기자전거가 일반 자전거에 비해 수월할 뿐이지 오르막에선 페달을 밟아야 한다. 그렇게 산 2개를 넘어 마주한 해수욕장은 누가 올까 싶은, 이미 철 지나 폐장한 해수욕장처럼 쨍한 햇볕 아래에서도 을씨년스럽고, 이국 전망대는 이국적인 물색깔과 막힘 없이 탁 트인 바다를 보여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싫어서 다시 구글맵 검색, 역시나 산을 넘는 건 마찬가지지만 다른 길이 있다. 중간에 수국로드, 디저트 전문점이 있다. 대마도에서 제일 흔하게 본 게 편백나무와 수국 아닐까, 싶다. 근데 길가에 수국 피어있으면 수국로드냐, 대체 왜 수국로드인 게야! 디저트전문점은 문 닫은 지 꽤 된 듯, 가게 유리창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모든 정보는 참고사항일 뿐 전적으로 믿어선 안된다.
이즈하라 세이잔지에서 먹은 밥이 너무 맛있어서 평지가 적은 대마도라 쌀을 수입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한국의 여느 산골 동네처럼 여기도 먹고살기 위해서 논밭을 만들었을 것이고, 계곡물 흘러내리는 거로 봐선 물이 부족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럼 논은 만들어진다. 어쨌든 일본 쌀(품종)이 맛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평야를 만났고, 하늘을 담은 논에 부는 바람을 실컷 맞고 산을 2개 넘어 소바동네에 도착했다.
수십 년 전, 지금은 사라진 태화백화점 문화교실에서 고 최민식 선생께서 사진 강좌를 할 때 수강했다. 전국적 명성을 가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도 학위가 없으면(그마저도 인맥, 학맥이 있어야 가능하지만) 시간강사에 부업 뛰어야 하는 게 한국 대학의 현실이었고,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어느 날, 수업 끝나고 선생께서 백화점 뒤편 소바집으로 데려갔다. 소바를 처음 먹은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이 날 이후로 소바를 좋아하게 됐다. 국물에 든 면이 아니라 국물에 적셔 먹는 방식과 무심한 듯 뚝뚝 끊기는 메밀면의 식감이 좋았다. 그 이후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동안 소바가 아예 없는 동네에 살고, 그러면서 잊고 있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후 나름 유명하다는 소바집을 갔는데 국물이 너무 달았다. 맵고 단 음식은 소금으로 맵기와 달달함을 증가시킨단다. 이렇게 짬뽕, 불닭, 마약 떡볶이 등 보다 더 맵고 달달한 음식을 찾는 건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나오는 호르몬이 스트레스를 떨어트려서라는데 그만큼 평소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있는 반증이라는 어느 의사의 말처럼 심심한 맛이 점점 사라지는 세상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된 소바집, 손님은 나 혼자다. 건물 입구에 붙은 명판을 보니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행안부에서 실시하는 농촌지원사업에 선정돼서 보조금을 받아 사업을 하는 것 같다. 기대했던 맛이다. 약간의 찰기를 지닌 뚝뚝 끊기는 메밀면일 뿐인 소바가 특별나게 맛있을 수가 있나 싶다. 국물이 심심해서 좋았다. 고무를 튀겨도 맛있다는데 갓 튀긴 새우와 우엉이라니, 맛있다. 고구마를 한반도에 전해준 동네, 다음에 오게 되면 하룻밤 묵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