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종묘, 창경궁
어릴 적 잦은 이사의 경험 덕분인지 낯선 공간과 새로운 지역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여러 번을 와도 무슨 이유인지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 곳이 있다. 강남이 그렇다. 2000년대 초반, 근 10여 년을 서울에 머물 때도 업무 관련으로 어쩔 수 없이 갈 일이 아니면 스스로 가지 않았고, 가기도 싫었다. 그러고 보니 강남에 사는 지인이 거의 없는 것도 한몫했겠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장기출장으로 묵는 숙소가 남부터미널 근처 서초동이다. 10여 년을 서울 살았을 때 보다 더 많은 날을 강남에 머문다. 배송 갔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가 재개발 기대감으로 몇십억 원이 넘는다고 동료가 얘기하기에 마음이 더 멀어졌다. 누구는 그 자산이 1순위이겠지만 그 자산뿐인 동네가 매력적이지 않고 궁금함이 없다. 알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사랑은 싹틀 수 없다. 그래서 휴무일이면 지하철 타고 강북으로 온다. 같이 출장온 동료들은 그 먼데까지 갑니까? 묻기에 순댓국 먹으러 자가용 타고 1시간 걸려서 하남까지 가는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지 했다.
지난번에 현대미술관, 서울역, 시립미술관, 역사박물관, 사진박물관을 둘러봤으니 비 올 듯 구름이 잔뜩 낀 오늘은 궁궐 투어를 하기로. 창덕궁 둘러보고 후원 입장하려니 시간제 입장이다. 오~ 이런 방식, 괜찮다. 국립공원은 물론 유명 유적지, 박물관, 미술관은 시간대별 혹은 날짜별 입장인원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공연장, 영화관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입장권 끊기는 대로 제한 없이 입장시켜서 마치 돛대기시장처럼 북적대는 곳에서 문화예술적 감정이 생기겠는가? 비도 내리고 예상외로 입장인원이 많지 않아 천천히 둘러봤다. 두어 시간 돌아다녔더니 배가 슬슬 고파온다. 곧 후원 입장 가능한 13시지만 어떤 일이든 우선순위가 있다. 오죽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을까?
인사동 쪽으로 내려와서 어딜 갈까 하며 접어든 골목길, 형제불백 식당에서 나오는 관광객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의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이럴 땐 망설이지 말고 들어가야지. 돼지불백(9천 원), 충분히 만족스럽다. #형제불백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32길 58 1층
처음 지을 때 완성형으로 지은 게 아니라 신위를 모실 왕이 늘어나자 증축을 한 건축물이라는 종묘, 북쪽문을 통해 창경궁으로 연결된다. 지금껏 봐온 궁궐이 동서남북 빈틈없이 꽉 찬 계획도시 같은 느낌을 줬는데 창경궁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해서 지었단다. 오히려 정형화되지 않은 건물 배치가 편안함을 줬다. 도심 한복판에 새소리 들리는 우거진 숲, 산책하기 좋은 평탄한 흙길이 있다. 이것이 센트럴 파크 아닌가? 발길 가는 대로 궁궐을 거닐고 맛있는 밥까지 먹은 내가, 민주공화국의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