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잿더미가 있겠지 뭐. 그러니까 돈은 주고 일 시켜라 쫌
땅이 울리고 심장이 울립니다. — 이 표현 대학교 자소서 첫 문장으로 엄청 울궈먹었다. — 살아있다!라는 단어를 실감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우연히 인디밴드의 음악을 듣고서는 빠져들었는데, 공연장에 갔더니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나는 공연기획을 할거야! 결심했다.
원하던 대로 한예종에 입학을 했다.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 주파수가 맞다. — 당시에는 이렇게 얘기했다. 학교 안의 누구와 얘기하든 하나의 주파수를 공유한 느낌. 학교 밖에서는 표준 주파수에 맞추기 위해서 어딘가 힘이 들어간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는 힘을 빼고 내 모습 그대로 얘기할 수 있었다. 공연으로 먹고사는 게 힘들다면 판을 바꾸면 되지. — 당시 사물함에 붙여놨던 문구처럼,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감 뿜뿜.
무언가에 몰입해봤다면,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내가 그랬다. 너무너무 공연이 하고 싶어서, 학교에 들어와서는, 원 없이 공연을 했다. 한예종에서의 배움은 강의실 보다도 그 바깥에 더 많았다. 학기 중 공연을 치르는 것은 가장 큰 수업이었고, 모두가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 내가 가진 공연들의 기록을 되돌아보면, 학교에서 치렀던 공연들이 졸업 후 했던 공연들보다 기획자로서 배울 것이 더 많았다. 공연에 미친 사람들끼리 밤새워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공연.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이런 프로젝트는 생기가 넘칠 수밖에 없다. 청춘남녀 밤새워 작업하면서 눈도 맞고 말이야.
공연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은 학부 3학년이 끝날 때 즈음이었던 듯 싶다. 그때는 학교 내부 공연뿐 아니라 외부 공연도 계속 하고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한다는 얘기가 돌았는지 하나가 끝나면 다음 공연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공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지만, 교통비를 빼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공연 하나를 위해서 몇 달 동안 밤을 새우고 예산을 신청하고 뛰어다니는데, 나의 시간은 교통비도 안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기획자로서 내가 다른 스탭들에게 언제나 했던 멘트는 최악이었다. — 저희가 예산이 별로 없어서요. — 아, 이 바닥에서는 못 살아남겠구나. 콩깍지가 벗겨졌다.
그때부터 막상 공연을 그만두기까지는 3년도 더 걸렸다. 마음이 아팠다. 고등학교 때부터 동경해오던 나의 모습이었는데. 정말 그만둬야 하는 걸까. 노력해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우리 사이에 타협점을 찾을 수는 있지 않을까. 안 하려 해도 공연은 들어왔고, 그러면 어느 순간 새로운 공연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발 헤어져라 싶은데도 왜 단칼에 쳐내질 못했던 건지. 졸업 학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교내 상담센터도 다녔는데, 이건 혼자 상담받아서는 될 게 아니었다. 커플 상담이 필요했다. 공연이랑 같이. 너 나한테 이럴 수 있니.
공연을 그만두고 취업준비를 하는데, 지지부진한 이별의 검은 아우라로 둘러싸여 도저히 아무것도 동의할 수가 없었다. 열정을 표현하라니, 회사와 회사원의 비즈니스적인 관계에서 열정 운운하면서 제 값은 쳐주기는 할건가? 내가 열정을 보여주면 너는 내 열정 먹튀할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없다. 회사여, 회사원에게 말로하는 칭찬 따위 필요 없으니 이쁘면 그 만큼 돈으로 사랑을 보여다오.
다 옛날 얘기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다 지난 일이라 그렇다. 완전히 방향을 틀고 새로운 업계에 들어온지도 7년 차. 작년에는 시니어 타이틀을 달았다. 지금까지 어찌어찌 길을 찾긴 했나 싶다. 공연하던 시절, 한예종을 다니던 그때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학교 생활도 마음껏, 공연도 마음껏, 진짜 재미있었거든. 시작도 안 해보고 찜찜하게 있느니 원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좋다. 하지만 몰입했던 것이 잿더미가 되고 나서 단단히 다져지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공연판 튄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제는 쿨해보이게 말할 수 있어야지. 아직도 미련 못 버렸으면 그야말로 미저리지 뭘.
당시 학교에서 공연 열심히 한다, 일 좀 한다 하던 사람들 중에, 아직까지 공연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