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키스는 엘프와』
코끝이 매운 겨울이다. 추수가 끝난 논과 비닐하우스에 밤새 하얀 눈이 탐스럽게 내렸다. 언제 그리 많은 눈을 내렸냐는 듯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더 매서워졌다. 눈 덕분에 햇빛이 사방으로 반사되어 온 마을이 환하다.
이른 아침 비닐하우스가 모여 있는 저 쪽 끝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시끌시끌하다. 모두 어르신들이다. 할머니 손에 들린 노오란 양은 주전자에서 김이 펄펄 피어오른다. 어르신들의 입에서도 끊임없이 입김이 나온다. 말씀들도 많으시지.
그 속에 영길이가 있다. 17세, 이 마을 유일한 젊은이, 이장 아들 영길이가! 돈 10만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에 휩싸이는, 그래도 끝내 외면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영길이가.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눈 덮인 시골 풍경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영길이의 심정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어르신들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웃음이 터졌다. 겨울이 배경이지만 따뜻했고 유쾌했다. 『첫 키스는 엘프와』에 실린 단편 6편이 다 그랬다. 다른 청소년 소설처럼 입시와 경쟁, 왕따, 학교 폭력 등 실제 있을 법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다른 책과 다르게 다 읽고 났을 때 가슴이 마냥 답답하거나 무겁지 않았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을 딱 가를 수 있다고, 친구 하고 싶은 애와 멀리하고 싶은 애를 딱 가를 수 있다고 믿었는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덩치,
서울 올라와 술 마시고 잠이 든 엄마를 아빠 대신 업는 현진이,
멀어진 친구와 다시 가까워지기 위해 과감히 첫 키스를 시도하는 윤채,
‘난 아니라고요. 샘이 의심하고 따지고 들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라 그 노인네라고요, 씨발!’ 담임선생님에게 전화해 욕을 하는, 그림책 ‘지각대장 존’ 이야기를 하는 뚱녀,
재수 없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장이 주는 믹스커피 향이 진짜로 풍겨올 것 같은 ‘우리들의 라커룸’,
인기절정 영길이까지
모두 다 사랑스러웠다.
얼마 전 동네책방에서 옛 이야기 강연을 들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여우 누이’ 등 옛 이야기를 해석하는 시각이 신선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도 있었다. 그런데 자꾸 옛 이야기를 지금 현실 상황과 연결해 설명하니 조금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면서 문학이 뭐지? 우리는 왜 문학 작품을 읽는 거지? 아이들이 왜 좋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 좋겠는 거지? 라는 물음이 떠올랐다.
며칠 뒤 다른 강연을 듣었는데 ‘옛날이야기가 현실을 그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오히려 떠나게 해주고 다른 세계를 즐기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는 현실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해준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 전 불편했던 감정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지침서는 아니다. 이야기는 다른 지점을 생각할 수 있게 비추고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야기를 자꾸 현실에 ‘대입’해서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이야기가 그리는 세계에 가 닿지 못한다. 『첫 키스는 엘프와』를 읽으며 이것은 비단 옛 이야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이 책에서 힘들고 괴로운 현실을 그대로 반복해 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꼭 판타지만이 좋은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재가 다루어지는 시각과 태도이다.
『첫 키스는 엘프와』의 이야기들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의 어떤 문제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힘든 이 시간이 너의 긴 인생에서 보면 찰나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웃으면서 건강하게 살라고 이야기한다.
이 땅을 살아가는 아이(청소년)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알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힘든 날의 연속이라도 그 날 중에는 커피 한 잔이 마음을 녹여주는 순간, 똥통학교여도 친구들과 함께 가니 더 없이 기쁜 순간 등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반짝이는 순간이 분명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이 그런 순간을 많이 발견하고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어른들과 아이들이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책이 할 수 있다면, 책으로 도피하고 책으로 상상하고 그래서 팍팍한 현실로 돌아와 다시금 힘을 내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첫 키스는 엘프와』최영희 지음, 푸른책들 (이 책은 최영희의 첫 청소년소설집이다. 이 책을 읽고 여러 이야기를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작가는 어느 순간 SF 소설들을 내고 있었다. 최영희 작가 덕에 고 김이구 작가도 알게 되었다. 장르는 변했을지라도 작가가 청소년을 바라보고 그리는 시선은 여전하다. 나는 그것이 좋고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는 유쾌하면서도 찡한 무엇이 있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