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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Oct 25. 2021

어느 가슴시린 소나기

- 스마트소설 -

그에게는 한동안 비만 오면 유독 나타났던 습관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갓 대학에 입학했던 그해 막바지 장마철 어느 늦은 오전의 소나기가 발단이었다. 


소나기가 예보된 그 날 아침 일찍 집을 먼저 나선 가족들에게 멀쩡한 우산을 모두 빼앗겼고 우산 살이 하나 빠져버린 해어진 우산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종일 내릴 비가 아닐 것이기에 그는 그냥 운에 맡기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그날 예보된 소나기가 절대 오지 않기를 학수고대했으나 그 기대는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러 갈 때 여지없이 깨어졌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오후에 내린다고 했었는데, 오전 내내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간간이 빗방울을 뿌리더니 아직 정오를 넘기지 않은 시각에 느닷없이 강한 비를 삽시간에 지면에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항상 기대했던 건 내 맘대로 안돼’라는 자조 섞인 말과 함께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내리는 비를 모두 맞고 있던 순간 갑자기 비가 멈추었다. 

깜짝 놀라 옆을 보니 그의 왼편에 훤칠한 키의 어떤 사내가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반쯤 그를 위해 내주고 있었다. 


“우산 안 갖고 나오셨나 봐요?”


바리톤 성악가 같은 사내의 굵은 목소리에 그가 얼떨결에 “네”라고 짧게 답했고 그 사내는 “같이 써요, 비 많이 오는데.” 하며 미소짓는다. 


지하철역 입구까지 동행해준 그 사내와 헤어진 후에도 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작은 나눔으로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게 한다는 걸 새롭게 느낀 하루였다.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다면 꼭 한번 해보고 싶은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해 가을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다. 


그가 학교 근처 지하철역을 막 빠져나오려는데 억수 같은 장대비가 한바탕 대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가방 안에는 언제나 사용 가능한 접는 우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우산을 막 펴는 순간 저 앞 횡단보도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머리를 황급히 가리고 있던 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짧은 치마의 그녀가 동동거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부리나케 그녀에게로 달려갔고 가쁜 숨을 내리 몰아쉬며 그의 우산 반쪽으로 허락도 없이 그녀의 머리 위를 재빨리 가렸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깔았다.


“같이 써요, 비 많이 오는데.”


“어머!” 하며 흠칫 놀란 그녀가 우산 밖으로 튕겨 나갔다가 이내 그의 외모를 위아래 훑고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그의 우산 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멀리서도 그녀가 그의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마음이 두근거렸다. 우산 하나를 나누어 쓰고 캠퍼스까지 한참을 걸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 역시 신입생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학과 건물과 그의 학과 건물은 정반대였다. 

캠퍼스에 들어서자 빗발이 약해졌다. 

그리고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가 조금 주저했지만, 매정할 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비가 안 오네요. 저는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해서. 그럼 이만…….”


“네?, 아, 네…….”


그녀가 실없이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뭐 저런 허릅숭이 같은 녀석이 다 있냐는 표정이다.


그가 그녀를 보슬비에 남겨두고 뒤돌아섰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웃음기 있는 대답 “네?”가 자꾸만 귀에 거슬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뛰었다. 

왠지 이대로 계속 가면 안 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뒤돌아섰다. 

그녀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업 중에도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있는 학과 건물로 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를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그녀의 학과 건물에 갔지만,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엔 습관처럼 우산을 들고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횡단보도 근처에 하염없이 서 있기도 하였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하지만 그걸 모르는 똥강아지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횡단보도를 바라보곤 하였다. 


1학년을 마치고 군입대를 결정했다. 

그가 복학하면 더이상 그녀를 학교에서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를 찾는 대자보를 그녀의 학과 건물에 용기 내 붙였다. 

하지만 이내 학과 사무실 조교에 의해 반나절도 못되어 철거되어 버렸다. 


복학 이후에도 횡단보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의 시린 마음도 그대로였다. 


그곳을 건널 때마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그녀의 웃음기 섞인 대답 “네?”가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그날 내렸던 소나기처럼 강하게 홅고 지나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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