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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Oct 25. 2021

설거지 경력 25년 차가 해주는 말

- 스마트소설 -

신혼 초 그의 아내가 친정에만 가면 처가 식구들에게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는 도무지 그것을 기억할 수 없었다.


“아니 글쎄, 결혼만 하면 평생 내 손에 물 한 방울 뭍이지 않겠다고 오빠가 약속했다니까 그러네.”


“박 서방. 사실인가? 그래서 요즘도 설거지는 항상 자네가 하는거야?”


장모님도 못 믿겠다는 듯 웃으시며 말하는데, 옆에 앉아있던 처형이 남편의 엉덩이를 발바닥으로 툭 치며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니도 좀 제발 제부 반의반에 반만 따라가 봐라! 도대체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해요!”


사과 한쪽 집던 형님의 손에서 사과가 미끄러졌다.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형님의 말에 처형은 너가 언제 사람이었냐고 맞받아쳤다.

아내의 계속되는 근거 없는 주장에 그가 과하게 손사래까지 쳐가며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하였지만, 그의 아내는 뭐가 아니냐며 인제 와서 헛소리 말라며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맞벌이하면 남자고 여자고 집안일에 구별이 없어야 한다. 요샌 다 그런 세상 아니냐?”


장모님 말씀에 뾰로통해진 건 처형뿐이었다.


“내가 직장을 나가도 이 인간은 절대 부엌에 얼씬거릴 인간이 아니야!”


설거지 경력 25년 차. 

그는 처가 식구들에게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집안일 가운데 유독 설거지가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첫 설거지가 강요가 아닌 자발적이었음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결혼 후 그의 아내가 그에게 해준 첫 저녁밥은 볶음밥이었다. 

거짓 없이 맛있었다. 

식사 후 그가 아내를 대신해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식사 후 설거지는 그의 몫이 되었다. 


사람은 참 간사해서 배부르고 등따스우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설거지가 이에 해당한다. 

그 향기롭고 맛있던 음식들이 더럽고 지저분해져 버려 악취까지 풍기는 건 삽시간이다.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것도 당연히 설거지의 연장 선상이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설거지 후 그가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자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 있던 처리장소에 나왔는데 그곳에서 한 나이 많은 아주머니를 만났다.


“뉘 집 남편인지 쓰레기도 다 갖다 버리고. 우리집 양반은 뭐하나 몰라. 어이구 웬수댕이.”


지금 그의 행동이 칭찬받을 일인가 의아했지만 오래전 직장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난 아내를 적극적으로 도와 집안일도 잘해. 하지만 음식물쓰레기 처리는 밤 12 넘어서 하지. 일단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다가 단지 내 오고 가는 사람이 없을 때 후다닥 나가서 후딱 버리고 오는 편이야.”


“왜 그런 수고를 하시나요? 사시는 데엔 자정 넘어 버려야 하는 규칙이라도…….”



“아니, 그냥 쪽팔리잖아. 남자가 하기엔.”


그는 자신보다 그리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데 그의 직장 선배가 너무 가부장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집안일을 하려는 그의 선배를 책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요즈음 갓 들어온 젊은직원들을 상대로 ‘라떼는’ 말을 잘 안 하려고 의도적으로 애쓴다. 

꼰대처럼 보이지 않고 젊은 후배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가 그들과 대화 나누면서 요즘 신혼부부들은 맞벌이 가정이 많고 남자들 대부분이 아내가 결혼 후 일하기를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집안일도 서로 나누어서 하려 하지만 유독 남자들이 꺼리는 집안일이 설거지라는 것에 그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설거지 경력 25년 차인 그가 그의 직장 젊은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해주는 말이 있다. 

아내가 바깥일을 하든 안 하든 설거지와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일은 무조건 남편이 먼저 하라는 것이었다.


“힘들고, 더럽고, 냄새나고 그래서 하기 싫은 집안일은 전부 남편이 먼저 할 일이야!”


그가 왜 그런지 아느냐고 젊은 후배들에게 묻고는 답변을 기다릴 새도 없이 나머지 말을 이어갔다.


“먼저 할 일이란 건 순서가 정해져 있다는 거야. 먼저 못하면 그다음 사람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집안일에 역할 정하지 마. 그건 서로를 종속시키는 아주 못된 짓이야. 먼저 하라고. 먼저! 결혼은 서로의 삶이 편해지자고 하는 게 아니라 고생을 나누려고 하는 거잖아.”


설거지 경력 25년 차가 말해주는 일장 연설 앞에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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