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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Oct 26. 2021

그날의 저녁놀

- 스마트소설 -

아빠의 안색이 순간 일그러진 건 늦은 저녁 무렵 고모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


수화기 너머러 들려오는 고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숨너머갈 듯 들린다.


“나간지 얼마나 되신거라고?”


“아침 자시고 나갔으니 지금 벌써 12시간도 더 넘은 거 아니겠나. 자정이 다 돼가는데 난들 어찌해야 할지 당최 모르겠다.”


“지금 당장 파출소에…….”


“벌써 애저녁 신고했지. 울 아버지 이 동네에선 워낙 유명인사 아니나. 파출소에선 넘 걱정하지 말라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불안하고.”


“그러니 진작에 요양원에…….”


“아이, 넌 자꾸 그 딱한 소리 좀 그만해라. 이미 다 끝난 얘기 같고. 다른 말 말고 느그 애들 데꼬 건너와라. 

같이 찾아봐야지 답답해서 이대론 못 있겠다.”


고모와 통화를 하는 사이 엄마 역시 곁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아빠의 통화에 귀를 쫑긋하고 있었다. 

아빠를 따라나설 사람은 사실상 나밖에는 없었다. 

형은 요즘 한창 전문의 자격시험에 매달려 있어 매우 바빴다. 

그런 형을 집에서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더 보기 어려운 건 누나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론 매일 같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그저 누가 보면 양조학과 다니거나 술 먹기 위해 대학 간 여자처럼 보일 것이다. 


내가 아빠를 따라나서려 했지만, 아침 일찍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딜 가려 하냐고 엄마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큰 애 오면 고모 집으로 좀 오라 해줘.”


아빠가 황급히 집을 나서며 엄마에게 부탁했지만 중요한 시험이 낼모레 코 앞인데 부담 주지 말고 당신 혼자 다녀오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었다. 


우리 집에선 내가 할아버지를 제일 좋아했다. 

왜냐면 할아버지가 나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가끔 우리 집에 오시는 날엔 형과 누나는 가볍게 목례만 하는 듯 마는 듯하며 다시 제방으로 쏙 들어가는 반면 나는 내가 그동안 조립했던 건담로봇을 할아버지에게 자랑하기에 마냥 바빴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약지와 소지를 붙여보라고 한 적 있다. 

너무도 자연스레 됐지만, 형과 누나는 흉내조차 못 내고 손가락이 제각기 놀며 손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하이고 욘석. 역시 내 강아지구나. 날 아주 쏙 닯았네 그려.”


할아버지처럼 똑같은 손 모양을 할 수 있는 나를 할아버지는 너무나도 좋아하셨다. 

그런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추석 명절 때였다. 

많이 불편하신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시고 내가 건담로봇을 가지고 와서 자랑해도 나를 바라보는 눈에 초점이 없으셨다. 


연신 할아버지 앞에서 종알거리는 나를 엄마가 강제로 떼어 놓으며 할아버지 많이 아프시니까 성가시게 굴지 말고 조용히 내 방에 가서 놀라고 내 등을 떠미셨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시며 내 손을 잡아주셨다. 

그때 할아버지의 손이 너무 차갑고 뼈만 앙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아빠? 할아버지는……?”


아빠는 평상시 보다 힘이 없으신 모습이었고 내 물음에 경찰 아저씨들이 곧 찾게 될 거라며 안심시켜 주셨다. 형은 집에 없었다. 

누나 방에 가보았다. 

아직도 자고 있다. 

밤늦게 술 먹고 들어온 모양이다. 

여기저기 뱀 허물 벗은 듯 옷가지들이 방안에 널려 있었다. 


거기까지가 그날 내가 기억하는 사건 전부다. 


그리고 훗날 아빠가 심근경색으로 극심한 고통을 여러 나날 겪으시다가 갑작스레 병상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나와 형 누나를 앉혀두고 그날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오셨는지를 말해 주신 적이 있다.


“그날 내가 회사에서 너희들 할아버지가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너희들 고모한테 전해 듣고 급하게 가보니 완전히 거지꼴을 해서 계셨는데……. 

할아버지가 그날 평상시처럼 산책 나왔다가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리면서 그 이후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고 하시더구나. 주변엔 오가는 사람도 없는 한적하고 외진 곳이었고. 

그렇게 홀로 밤새 혼자 온몸을 주무르고 나서야 새벽에 다시 근육이 살아났고 기운이 생겨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하시더구나. 이제는 내가 그런 걱정을 하게 됐어. 

퇴원해 나가더라도 나 혼자 돌아다니기가 겁이 나는구나.”


아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창문으로 지는 해의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자연이 만든 경이로운 그림이 하늘에서 펼쳐졌다. 


하지만 나도 곧 지는 해를 따라 노을이 되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병실에서 바라본 그 날의 저녁노을만큼은 그다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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