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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Nov 01. 2021

버스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

- 스마트 소설 -

“헬로? 디스 이스 앤드류 스피킹.(앤드류 입니다.)”


“…….”


“엑스큐스 미, 후 이스 디스?(실례지만, 누구시죠?)”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저…….”하는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곳에서 한국인의 전화를 받을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순간 한국어를 정확히 들은듯하여 나는 

“네. 말씀하세요”하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오빠”하고 들려온 그녀의 음성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누, 누구……?”


“어머, 오빠! 영어 이름 멋지네. 근데 나 벌써 잊은 거야?” 


이번엔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말하였다, 


오래전 그녀였다. 


내 가슴속에 묻어두지 못하고 여러 날 지우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바로 그녀였다.


“왜 말도 없이 간 거야? 오빠 소식 전해 듣고 간신히 집 전화 알아냈어. 나 때문에 많이 피곤했지?”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어느덧 그녀의 낭랑한 음성은 그동안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기억의 편린(片鱗)들을 내 머릿속에 뿌려놓고 있었다.


군 복무 후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끝없는 취준생의 길을 걸어야 했고 그녀는 졸업과 동시에 일찌감치 직장을 구해서 출근과 퇴근이란 단어가 익숙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퇴근 후 만나는 나의 일상은 그녀의 업무 스트레스 해우소와 같았다. 

만날 때마다 그녀는 직장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와 주변 남자 동료들의 끈적한 시선이 정말 불편하다며 불평불만이었다. 


언젠가는 자기 일을 도와준 남자 직원에게 단순한 호의로 저녁 식사 대접했는데 마치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거로 멋대로 착각하며 수시로 치근덕거려 미치겠다고도 했다.

여자의 호의를 과대해석하여 그런 착각에 빠진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오빠도 그중의 하나지”라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리 오래 사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짧게 사귄 사이도 아니었는데 너도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며 벽을 단단히 치는 그녀가 놀라웠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시간 그녀가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직장 남자 동료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자리에 빨리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너무 치근덕거려서 남자친구 있는 걸 확인시켜 주겠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문을 했다. 

현재 외국계 직장 다니는 거로 위장하라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그쪽으로 취업 준비 중이기도 했다. 

하지만 망설여 졌다. 

그러자 그녀의 술 취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오빠, 나 안 뺏길 자신 있어?” 


도발적인 그녀의 질문에 난 헛웃음부터 나왔다. 

그리고 심장이 떨렸다. 

그녀의 자신감에 비해 내가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다. 

안개 낀 내 삶을 생각하면 그냥 무서웠다. 


그녀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을 확인해 보고는 싶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너무나도 우연히 찾아왔다.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뮤지컬 티켓을 가장 좋은 자리로 거금을 주고 정말 어렵게 구했다. 

나름대로 깜짝 이벤트였기에 그날까지 말을 안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와 뮤지컬을 관람하려 한 바로 그날 몇 시간 전 그녀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다. 


“오빠, 오늘 우리 만나기로 한 것 다음으로 미루자. 오늘 아빠가 가족여행으로 어디 좀 가재.”


“어디를 가는데?”


“몰라. 뭐, 남산이나 가겠지.”


무남독녀 외동딸을 끔찍이도 아꼈던 그녀의 아버지는 참 자상하였다. 

나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른 채 그 비싼 티켓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다. 


그날이 후 내가 연락하지 않고 그녀가 연락해 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그 후 오늘에서야 그녀가 연락해 온 것이었다.


“오빠! 나 예전부터 외국 살아보는 게 꿈이라고 했잖아. 퇴사도 한 마당에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배낭여행 한번 해보려고. 오빠 있는데도 가보고…….”


“패키지여행으로?”


“아니, 나 혼자. 근데, 지금 곁에 누구 있어? 여자 목소리 들리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 혼자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몇 번이나 더 확인했려 했다.

난 짜증이 났다. 

말을 돌리려고 무심결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어보자 전화해줄 거냐며 반색하였다.


그녀라는 버스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올라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거라는 내 판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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