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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는 세지만 저는 약합니다.

더이상 마시지 않습니다.

by 크바스

어학연수 중 같은 반 일본 친구의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 모임이 열렸다. 고작 두 달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깊이 친해졌다. 국적도, 나이도 다양했던 친구들이 늦은 저녁 일본 친구의 기숙사에 모였다. 떠나기 전, 일본 친구는 다양한 일본 음식을 준비해두었다. 거기에 고급 보드카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음식도 먹음직스러웠지만, 보드카의 유혹이 훨씬 강렬했다. 한 잔을 들이킨 보드카의 첫인상은 뜨거움이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깔끔하고 은은하게 달달한 끝맛이 매력적이었다. 겨우 한 잔 마셨을 뿐인데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정체 모를 자신감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밀려왔다. 술기운의 달콤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빠르게 친구와 건배사를 주고받으며 잔을 기울였다.


<짜르스카야 보드카> 골드와 실버. 개인적으로 이 두 보드카 맛이 가장 좋았다. 선물로도 많이 사갔다.


술자리의 동반자는 덴마크에서 온 마크였다. 190cm가 넘는 거구에, 누가 봐도 바이킹 전사를 떠올리게 하는 체격과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역시나 마크는 술을 잘 마셨다. 거의 반병 가까이 함께 마셨지만, 그는 전혀 취한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보드카는 결국 1리터가 넘는 병을 모두 비우게 했고, 거기에 맥주까지 곁들였다. 소주 한 병 정도가 한계인 나였지만, 그날은 무언가 달랐다. 더 마실 수 있을것만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묶여 있던 이성의 끈이 풀려버린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리려 발버둥 쳐봤지만 소용없었다. 반면, 함께 술을 마신 마크는 전혀 취하지 않은 듯 여유로워 보였다. 마크는 나를 말리며 "그만 마시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무의식중에도 술을 계속 원했다. 마크는 지긋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연신 "괜찮아?"라고 물었고, 나는 그저 "좋다",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바닥에 누워 술에 취한 채 친구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그곳에는 나름 잘 돼 가던 일본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술에 취했지만, 분위기와 상황은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심하게 취했지만, 정신의 한 조각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느낀 부끄러움은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대충 인사를 던지고 서둘러 나갔다. 너무 심하게 비틀거린걸까? 친구들은 기숙사의 다른 한국 사람을 불러와줬다. 12월 추웠던 러시아의 바람을 맞으니 취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뼈속까지 파고드는 러시아의 추위앞에 정신이 똑바로 차려졌다.


<질룐나야 마르까> 가격도 괜찮고 맛도 깔끔하고 좋았다.


휘청거리던 걸음은 똑바로 걸을 수 있었고 러시아어도 잘 할 수 있었다. 집에 안전하게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와중에도 택시기사와 흥정까지 하며 50루블에 기숙사 앞까지 가기로 했다. 새벽시간 혹시나 납치되는건 아닌지 정신을 차리고 또 차렸다. 다행히 기숙사 까지 빠르게 올 수 있었다.


휘청거리던 걸음이 점차 안정되어 똑바로 걸을 수 있었고, 러시아어도 제법 잘 할수 있었다. 집에 무사히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 와중에도 택시기사와 흥정을 벌여 50루블에 기숙사 앞까지 가기로 했다. 새벽 시간, 혹시나 납치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다행히 기숙사까지 무사히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기숙사에 돌아오니 모든 긴장이 한번에 풀렸다. 몸을 주체 할 수 없었고 속은 메스꺼웠다.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결국 모든것을 전부 토해냈다. 보드카를 먹은 것은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먹을때는 그렇게 좋고 행복했다. 보드카를 마시며 느낀 행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어 연신 보드카를 드리부었다. 그런데 겨우 몇시간 지났다고 이렇게 후회하고 있을까? 토를하며 주마등 처럼 스처가는 머리속 장면을 떠올리며 나를 괴롭히고 있는 비싼 보드카를 저주했다. 결국 나는 다음날까지 술에 절어버렸다. 하루종일 기숙사에 남아 학교에 갈 수도 없다. 역시 보드카는 쌔지만 나는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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