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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 한잔에 신념을 팔아버리다

정말 꿀맛이네요...

by 크바스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으로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랜 기간 술을 즐겨 마셨지만, 감사하게도 술을 끊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러시아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이 거의 필수 조건이었다. 작은 행사나 모임에서도 가볍게 샴페인과 포도주를 마셨기에,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미련한 선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인간관계를 맺는 자리에는 거의 항상 샴페인이 있었다. 생일 파티 때면 무조건 샴페인이 준비되었다. 게다가 친구들과 추운 겨울날 거리를 함께 산책할 때면, 꼰약이나 보드카를 가져와 한 잔씩 주고받으며 걸었다.


가끔 수업이 일찍 끝난 날이면 친구들과 보드카나 맥주 한 잔 하며 그날 배운 연기와 예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나는 술을 끊기로 결정했기에 친구들과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러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인 <러시아 샴페인>


그건 그렇고 절대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의 생일파티였다. 생일파티에서는 생일자가 샴페인과 다양한 술을 가져와 러시아식 음식과 함께 대접하는 것이 전통처럼 행해졌다. 친구 생일파티에 빠지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같은 반 친구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거기에 덤으로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한 지 벌써 1년이 되던 어느 날, 그렇게 잘 지켜오던 나의 신념이 한 번 무너진 적이 있다. 같은반 친구 생일파티는 격렬하게 몸을 사용하는 ‘신체 움직임’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나는 이미 땀에 절어 있었고, 거기다 챙겨온 물도 다 마신 상태였기에 갈증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였다.

준비된 생일 상에는 시원한 백포도 샴페인이 놓여 있었다. 냉기를 머금은 샴페인병은 차갑게 물기가 가득했다. 보기만 해도 갈증이 떠나갈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순간 내면에서 샴페인을 마시고자 하는 유혹이 치밀었다. 샴페인이 알코올 도수가 가장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술 아닌가? 수업을 마친 늦은 밤 10시, 잠시나마 시원하고 달달한 샴페인의 유혹을 어찌 뿌리칠 수 있었을까?


우리 학교에는 정수기가 없었을 뿐더러 싸 들고 다니는 물도 고작 0.6리터짜리 페트병 하나가 전부였다. 밤 10시까지 마실 수 있는 물이 남았던 적이 없었다. 샴페인의 유혹은 강렬했다. 한 방울만 찍어 혀끝을 적시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계속 나를 유혹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날이었기에 더위를 참기란 더욱 어려웠다.(러시아도 여름에는 덥다) 무대에는 에어컨조차 없었고, 뜨거운 조명 열기만이 가득했다. 무대는 마치 아프리카 한복판에 있는 듯했다.


생일 축하를 위한 토스트를 하려고 모두 일회용 컵에 샴페인을 한 잔씩 받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컵 을 받았다. 다들 정신이 없어서인지 나에게 술을 받는다고 뭐라 하는 친구는 없었다.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거 마신다고 하나님이 날 미워하실까? 난 당장 목말라 죽을 판인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속 시원하게 “건배!”를 외치며 순식간에 샴페인 한 잔을 들이켰다.


러시아 골드 샴페인. 기억 하기로는 제일 맛있었다(?)

그 한 잔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목에 휘감기는 청량감은 모든 걱정을 잊게 해주었다. 타들어 가던 갈증이 단번에 사라졌고, 산뜻한 포도향이 입안에 감돌며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달콤하기까지 하니 피로마저 녹아내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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