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내 별명은 ‘정문에서 연희관까지 한 시간’ 이었다. 연희관은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주로 수업을 듣는 곳으로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작은 성처럼 생긴 건물인데, 학교 정문에서 도보로 약 10분에서 15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걸어오는데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내 걸음이 보통 사람보다 유난히 느렸던 걸까? 언젠가부터 내게 그런 별명이 붙여진 이유는, 내가 정문에서부터 연희관까지 걸어오는 중간중간에 마주쳐 인사를 해야 하는 친구들이 하도 많아서 인사하는 데만 40~50분이 족히 걸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인간관계 오지랖이 지나치게 넓다’라는 약간의 비아냥거림도 없지 않았던 것 같지만 나 자신도 그 별명이 그렇게 듣기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람에 대해 기본적으로 관심도 많았거니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내 대학 생활의 주요 낙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단대 동아리, 중앙 동아리, 운동 동아리, 연극 동아리, 학술 동아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대뿐만 아니라 공대, 법대, 문과대, 경영대, 생과대 등 다양한 전공의 독특한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었다.
남들과 비교해 나에게 친구가 좀 더 많았던 이유는,’옳다 그르다’의 관점에서 타인을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내가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된 배경은 남들보다 더 성숙해서도, 어떤 인간관계의 법칙을 먼저 깨달아서도 아니었다. 지방에서 초, 중, 고를 나와 상경한 지 얼마 안 된 촌놈의 눈에는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반짝거리는 친구들이 마냥 신기했고,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했기 때문이다.
‘네 생각은 틀렸어’가 아니라, ‘너의 생각은 내 생각과 좀 다르구나’의 관점에서 타인과 대화를 했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하였기 때문에 그들도 촌놈인 나를 친구로 받아 주었던 것 같다.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 내가 깨달은 점은 ‘나의 지식이란 동해의 드넓은 백사장 한 알 모래알보다 작으며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백사장의 모래알 수보다 더 많다’라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며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그나마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나의 등록금으로 월급을 받은 교수들이 아니라, 함께 술 마시고 부대꼈던 나의 친구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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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그 뜻밖의 여정의 시작
대학생 때 대학원을 다니고 싶다는 마음도 잠시 들었지만, 교수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별거 없다는 건방진 생각이 든 이후, 나는 급하게 취업 준비를 했다. 사회라는 정글에서 내가 생존할 수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대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취업 준비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취업의 과정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 대침체로 인해 채용시장은 급격히 얼어붙었고, 더욱이 문송(문과라 죄송)이었던 나는 서류도 통과하지 못하고 광탈(광속 탈락)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운 좋게 한 대기업의 서류전형을 턱걸이로 통과했다. 그리고 면접전형에서 경영학과 출신의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이 직무는 숫자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본인이 수학을 잘 못 한다고 생각하는 지원자가 혹시 있나요?’라는 자폭 유도 질문에 호기롭게 손을 들어 말도 안 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는데, 그것이 운 좋게 면접관들에게 ‘그 친구는 뭔가 절박함 있군’으로 해석되어(말도 안 되지만) 난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때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흑인 최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위대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한 해인 2009년, 현생의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제법 선득한 바람이 불어 새벽 이불깃을 끌어당기게 하는 여름과 가을 사이, 그렇게 난 회사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