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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써글 Oct 18. 2020

‘회사원인 나’와 ‘진짜 나’를 구분하는 지혜 - S

나 자신을 지키는 멘탈 호신술 S.E.L.F.G.

처음 받아본 심리 상담


   한때 공황장애 비슷한 증상을 겪은 적이 있다. 회사에 출근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손 떨림 증상도 있어 타이핑을 하는데 계속 오타가 났고, 누군가 날 부르거나 자리 전화벨이 울릴 때면 식은땀이 나고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당시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 정도도 심상치 않아, 나는 회사 생활 처음으로 사내 심리 상담 센터란 곳을 찾아갔다. 정적이 흐르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심리상담사는 차분한 말투로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최근 OOO 님의 삶에서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있었을까요?”


“네 최근에 직무 이동을 했어요. 전에 했던 일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지만,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직무 이동을 했던 경험이 몇 번 있어서, 특별히 큰 어려움은 없어요, 뭐 열심히 하다 보면 금방 적응할 것 같습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심리상담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OOO 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런 증상들이 갑자기 나타난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혹시 최근에 불편함을 느꼈던 상황을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음… 제가 이번에 맡은 일이 스텝(Staff) 업무라 회사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동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동료들 개개인이 처한 상황을 보면 예외적인 상황이 매우 많은데, 회사 규정으로는 다 커버할 수 없어서 죄책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심리상담사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생각이 정리된 듯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미안한 감정을 느껴야 하나요? OOO 님이 지금 하시는 직무에서는 당연히 회사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료들의 상황이 다 이해가 되고 딱하다고 해서 OOO 님이 회사를 대신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이에요. 담당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거지, 그것이 OOO 님의 본연의 모습은 아니잖아요?"


   그 말을 듣자, 가슴속에 꾹꾹 눌러놓았던 이름 모를 감정들이 갑자기 뜨겁게 올라왔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나의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라는 말에 왠지 모를 안도감과 서러움이 함께 북받쳐 눈물이 났다.


Photo by Tamara Gak on Unsplash
‘직장’이라는 연극 무대에 선 배우, 회사원

 

    하루 8시간, 연간 약 250일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직장’이라는 연극 무대에 선다. 회사원이라는 가면(Persona)을 쓴 채 그 역할을 충실히 연기해야 하는 업의 특성상 우리의 직업은 오히려 ‘배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수명에서 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부서, 직무, 직급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직장이라는 무대는 공연의 무대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맡은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맘대로 역할을 바꿀 수 있는 권리는 그 역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배우들이 메소드 연기를 펼치다 맡은 역할에 너무 몰입해 일상적인 감정을 잃어버리고 배역에 잠식당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대부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만 어떤 경우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장시간 후유증에 시달리거나, 심한 경우는 끝내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직장이라는 무대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잔혹해서 우리에게 혼란을 줄 때가 많다. 매일 아침 출근 전쟁부터 시작해 온종일 격무와 사람들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어느덧 하늘은 어두워져 있다. 나의 가치관에는 어긋나지만 회사와 조직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수행해하는 수많은 역할과 그에 따른 책임들에 짓눌려 내가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인지 아니면 회사원이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회사원이라는 배역에 진짜 나의 모습이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나’가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회사를 다니기 전, 내가 좋아했던 것은 무엇인지, 과거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가장 자랑스러울 때는 언제였는지, 나 스스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시 떠올리다 보면 무채색이었던 ‘회사에서의 나’에서 잠시 벗어나 컬러풀한 ‘진짜 나’의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인간들 때문에 회사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그리고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회사원을 연기하는 나’와 ‘진짜 나’를 구분(Separate) 보고 흔들리는 내 자아의 중심을 다시 한번 잡아보는 건 어떨까? 왜냐하면 ‘진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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