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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써글 Oct 18. 2020

호의가 계속되면 호구가 된다

원수는 회사에서 만난다

환경부 ‘호인 흡혈박쥐’ 유해 동물로 지정


   환경부는 ‘호인(好人) 흡혈박쥐’(학명 : Mensch Blood-sucking Chiroptera)를 2020년 9월 1일부터 ‘유해(有害)  야생동물’로 지정했다. 유해 야생동물은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에 피해를 주는 동물'이라는 뜻으로 한때 평화의 상징으로 사랑을 받던 비둘기가 분변(糞便) 및 털 날림, 문화재 훼손 등의 이유로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호인 흡혈박쥐’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다산과 복(福)을 불러오는 동물로 여겨졌고, 이집트 신화에서는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의리의 동물’로 등장했을 정도로 호인 흡혈박쥐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동물 중 하나였다.


   호인 흡혈박쥐의 대표적인 특징은 사람의 피를 유독 좋아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흡혈박쥐들이 사람의 피든 동물들의 피든 가리지 않고 먹는 반면, 호인 흡혈박쥐는 사람의 피 중에서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과 희생정신이 뛰어난 사람’ 즉 호인(好人)의 피를 특히 더 좋아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과거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부족의 리더인 ‘추장’을 뽑는 데에 이 박쥐를 이용했다고 한다. 인디언들에게 ‘추장’은 부족을 위해 헌신하는 지혜로운 리더를 뜻하는데 많은 추장들이 처음에는 부족을 위해 봉사할 것을 맹세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살림살이만을 챙긴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낀 한 주술사가, 추장 후보자들의 피를 몰래 뽑아 호인 흡혈박쥐에게 먹여보았다는 설화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후보자들의 피 중에, 호인 흡혈박쥐가 유독 먹으려 하지 않는 피의 후보자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겨 추장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그 후 인디언 사회에서는 리더의 자격이 있는 ‘의로운 사람’만이 추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들은 호인 흡혈박쥐를 ‘지혜로운 자의 피를 마시는 하늘 쥐’라고 부르며 신성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서구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박쥐들의 야생 서식지는 갈수록 파괴되었고, 살 곳을 잃어버린 호인 흡혈박쥐는 점차 도심의 빌딩 숲으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그 후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은 호인 흡혈박쥐는 유전자 변이로 인해 점차 사람의 모습으로 진화하게 되고, 자신들이 생존하기 유리한 환경인, ‘회사’에 직장인으로 위장 취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수많은 호인 흡혈박쥐들이 직장인의 모습을 한 채 도시로 유입되었다. 초기에 정부는 이 박쥐들을 박멸하기 위해 갖은 방법과 정책을 사용했지만, 이젠 그들이 내는 세금과 막강한 로비력 때문인지 퇴치하기를 거의 포기한 듯하다.


   최근 정부가 한 조치라고는 호인 흡혈박쥐를 유해종으로 지정하여, 그들에게 ‘모멸감’ 준 것 밖에 없다. 무능력한 정부의 정책 실패로 인해, 아직도 수많은 호인 흡혈박쥐들은 회사라는 빌딩 동굴에 살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주려 하는 사람,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하고 그 개체 수를 늘려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호인 흡혈박쥐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한 후, 개체 수 증가가 감소세를 띠고 있습니다.’


   어제도 환경부 장관은 TV에 나와, 특유의 뻔뻔한 표정으로 호인 흡혈박쥐를 박멸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단지 정치적인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전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회사에서 기회만 나면 다른 사람을 등쳐 먹으려 하거나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왠지 흡혈박쥐 같다고 생각하다가 위와 같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100% 픽션이에요.]

            

Photo by Clément Falize on Unsplash
회사에서 착한 사람이 되면 안 되는 이유


   주변에 퇴사한 동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순수하고 착한 사람, 즉 '호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조직에서 호인 흡혈박쥐와 같은 사람들에게 단물을 쪽쪽 빨리다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견딜 수가 없거나 어떤 결정적 사건으로 인해 자신이 이용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한 자괴감을 느끼게 되면 ‘퇴사’라는 트리거를 당기는 경우가 많다. 회사를 위해 진심으로 일했는데, 돌아오는 건 아무런 성과 없는 자괴감이라면, 그리고 그 자괴감을 준 사람은 나와는 달리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는걸,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면 그걸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조직에서는 호인처럼 보이면,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사람의 탈을 쓴 수많은 호인 흡혈박쥐들이 접근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들도 조심스레 작은 부탁부터 요구하며 긴가민가 이 사람이 호인이 맞는지 아닌지 요리조리 간을 보다, 상대가 배려심도 많고 순수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면, 본격적으로 그의 척수에 빨대를 꽂아 등쳐 먹으려고 시도한다.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자기 일을 은근슬쩍 미루는 행동으로 시작하여 점차 무리한 부탁을 하다가, 나중에는 호인을 마치 호구처럼 대하는 등 무례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게 된다.


   호인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천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호인 흡혈박쥐의 교묘한 술수를 당해 순간 부당함을 느끼다가도 그들의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미안한 척, 사과하는 척, 사정이 있는 척하는 연기에 다시 속아 넘어가 같은 일을 반복해서 당하는 경우가 많다. 당하고 속고, 당하고 또 속고··· 이것이 바로 회사에서 호인이 호구가 되는 악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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