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B 과장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다. 본사에서 임원 관련된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웬만한 고참 부장들과도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배포가 컸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때론 그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느낌도 들어, 나는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상사에게 주눅 들지 않고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이야기하는 그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약간 얄밉기도 했다.
그 후, 내가 오랜만에 B 과장을 만난 건, 그가 한 사업부 관리부서로 인사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약 두 달쯤 지났을 때이다.
그 사이 B 과장은 놀랄 만큼 바뀌어 있었다. 반짝이며 상대를 바라보던 그의 눈은 불안한 듯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바닥 쪽을 응시하고 있었고, 말투는 어딘가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업무협조를 요청했을 그였지만, 이번엔 왠지 연신 미안해하며, 사정을 봐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했다. 두 달 사이 변한 그의 모습이 갑자기 안쓰럽게 느껴졌다.
“B 과장님도 과장님의 역할이 있으시니깐, 과장님 입장에서 이야기하실 수밖에 없다는 걸 저도 잘 알아요. 그러니깐 미안하다는 말씀은 더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OO 씨, 그러니까 내가 또 미안하네”
B 과장의 변화는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미팅이 끝난 후 동료들은 하나같이
“와~ 사람이 인상이 바뀌었더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던데”
“얼마나 갈굼을 당했으면, 사람이 한두 달 사이에 저렇게 변하냐” 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B 과장은 새로 이동한 부서의 K 부장에게 완전히 찍힌 듯했다. K 부장은 사업부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꼰대 또라이였고, 평상시 B 과장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 듯했다. 부장은 하루에도 수차례 그를 불러 박살을 냈다.
일을 그렇게 처리하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냐는 둥,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는 둥 인격모독 발언뿐만 아니라, B 과장의 말끝마다 꼬투리를 잡아 B 과장 탓을 했다. 그리고 B 과장이 조금이라도 말문이 막히거나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냐고 담당자가 그런 것도 모르냐고 사무실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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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구분해야 당하지 않는다
나도 과거, K 부장 같은 부장놈(앗 오타)을 모셨던 경험이 있다. 그때 내가 느낀 점은, 부장에게 불려가 당할 때는 내가 뭔가 대단한 잘못을 한거 같고, 죄책감이 들다가도 시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왠지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 그때 그렇게 말할걸’, ‘왜 그 말을 못 했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하루는 날을 잡고 부장이 한 말을 하나하나 꼼꼼히 메모한 후, 조용한 회의실에 가서 차분히 읽어 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부장이 했던 말은 대부분 사실(Fact)이 아니었다. 약간의 팩트에 자신의 주관적 의견(Opinion)을 교묘하게 섞어 그것이 진실인 양 이야기 하고 왜곡했던 것이다.마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해 국민을 선동하는 질 나쁜 기자들이 쓰는 수법을 그는 사용하고 있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폭언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다가, 폭풍이 잠잠해지고 내 마음도 고요해지면 그 폭언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그 부장에게 불려갈 때면, 속으로 부장이 지금 하는 이야기가 사실(Fact)인지 아니면 근거 없는 개소리(Opinion)인지 구분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그가 사실이 아닌 것을 전제로 폭언을 일발 장전할 때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환기시켰다.
“부장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방금 ‘몇 달 전부터 말씀하셨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메모한 걸 보면 지난주 월요일에 그 말씀을 저에게 처음 주셨어요.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아요.”
“… 야 너 지금 나한테 따지냐? 너 미쳤어!?”
“하하, 그건 아닙니다.”
나도 악에 받쳐, 그렇게 몇 번을 부장이 한 말을 팩트체크하여 그에게 알려주었고, 부장은 첨엔 불같이 화를 내다가, 나중엔 내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이 한 말을 꼼꼼히 메모하고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는 것을 그도 알았는지, 점점 말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 버릇 남 못 주듯, 부장은 조심하다가도 감정 조절이 안 될 때면 나에게 또 폭언을 했다. 그러나 폭언의 횟수는 과거보다 현저히 줄었고, 무엇보다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그의 폭언을 듣더라고 더 이상 과거처럼 겁을 먹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아 또 사실이 아닌 걸 사실처럼 이야기해서 죄책감 주려고 하네’라는 생각에 어쩔 땐 속으로 웃음이 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