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을 배우겠어요

#28. 그건 생존본능이었음을

by 수현

엄마는 영화, 드라마를 무척 좋아하신다. 내가 어릴 때부터 태순이라고 불릴 정도로 TV 광이었는데 이는 엄마의 영향이 크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엄마와 함께 일주일에 영화를 2~3편 정도 봤다(고등학생 때는 야간 자율학습한다고 같이 볼 시간이 없었다). 특히나 중국 무협물을 유독 좋아했었는데 의천도룡기(양조위 주연), 판관 포청천, 측천무후, 정무문 등의 드라마에서부터 동방불패, 천녀유혼, 동사서독 등의 영화까지 접했다. 그 덕에 어릴 때 소림사에 가서 무술을 배우고, 무술로 다친 부위를 고칠 수 있게 한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실제로 중학교 2~3학년 때는 합기도와 킥복싱을 배우고 고1 때는 잠깐 유도부 동아리에 들어가서 유도를 배운 적이 있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무협영화를 많이 봐서 무술에 입문한 것이 생각할 테다. 하지만 사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파트 단지에서 변태를 만난 적이 있다. 변태는 눈빛부터가 다르다. 세상에 그런 눈은 처음 봤다. 안타깝게도 거리에는 그 아저씨와 나뿐이었다. 이상한 몸짓으로 나를 도와달라는 아저씨를 보고 나는 주저앉을 뻔했지만 침착하게 경비아저씨를 부르기 위해 이쪽으로 와보라며 슬그머니 도망쳤다. 집에 올라가서 엄마에게 이야기했고 경비아저씨한테까지 이야기했지만 그 개XX는 잡지 못했다.


다행히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그때의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문제는 몇 개월 뒤 그 XX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때는 등굣길이었다. 내 옆에는 친구도 있었고 주변에 다른 아이들도 있었다. 왜 그 XX가 그냥 '얘들아'라고 불렀는데 뒤를 돌아봤을까? 나와 친구는 아저씨의 이상한 몸짓을 또 확인해버렸다. 그때 나의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그때는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집 근처에서 그 아저씨가 다시 나타날까 봐, 내 눈을 또 더럽힐까 봐 중학생이 될 때까지 불안에 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게 아닌 일로 호들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순수했던 어린이에게 그건 충격이자 공포였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그 공포가 더 심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중2가 되어 무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건 아저씨에게 맞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두려움과 대면하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때 5년 간 발레를 하던 딸이 갑자기 무술을 배우겠다고 하니 엄마는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무협영화와 학원만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말한다. 그때 내가 너무 자주 다쳐서 한의원을 내 집 드나들 듯이 다녔음에도 무술을 계속했던 건 생존본능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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