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내, 나후
“엄마 강아지는 누구?” “야옹”
“엄마 강아지는 누구지?” “야옹야옹”
이렇게나 귀엽던 셋째가 말썽이다. 정말 말썽꾸러기가 됐다. 이제 26개월. 말도 늦고 행동도 늦고 키도 작아서 “동안 아기”라고 하던 나의 마지막 아가가 이제 방문턱 하나 넘을 때도 아주 신중해야하는 꼬마 대장이 되었다. 문을 스스로 열고 싶지는 않은지, 손에 쥔 것이 떨어지려고 하지는 않는지, 왼발로 넘을지 오른발으로 넘을지. 급한 마음에 겨드랑이를 잡고 단숨에 넘겼다간, 엉엉 운다. 아기가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걸어오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10초 아끼려다 10분 걸리는 수가 있다.
셋째다. 나도 농익을 대로 농익은 엄마라 자부한다. 울리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에 태우기까지 얼마든지 아이를 안 울릴 수 있다. 얼마든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아이가 셋이다. 하나를 울리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둘의 희생이 필요하다. “형은 언제나 멋있어.”라든가 “누나는 동생을 사랑하지?”라든가 하는 칭찬의 마법이 필요하다. 정말 그러긴 싫지만 일곱 살,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형과 누나의 어깨에 희생과 책임이라는 무게를 올려 놓는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
이 전략도 먹히지 않는 날엔, 나는 셋째의 기쁨을 댓가로 둘의 눈물바람을 맞아야 한다. 어떤 날은 마치 돌림노래 같아서 “왜 온후한테는 친절하게 말해?” “왜 나후한텐 웃어줬어?” “에엥엥에엥??”하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공평하게 친절하고 공평하게 화내기. 정말 어려운 미션이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니?
막내는 분유 먹던 습관이 아직 남아있는 아가다. (샤워하는데 1분도 안 걸린다. 씻을 데가 없어서.) 나후는 분유 대신 두유를 먹다. 두유는 항상 작은 방 베란다에 시원하게 있어야 하고, 직접 가지러 가야 하고, 종이팩에 붙은 빨대의 비닐은 본인이 보고 있을 때 허락을 받고 떼야 한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두유 빨대를 가져다가 꽂아 줄까봐 그런지 늘 불안한 표정이다. 거기까지 통과했다 하더라도 빨대로 작고 동그란 은박을 뚫는 타이밍을 잘 지키지 못했다면 실패다. 울리고 말 것이다. 타이밍의 규칙이란, 그야말로 제 멋대로다. 나후가 원하는 순간 나후가 원하는 느낌과 속도로 꽂아야 한다. 여기서 의기 양양하자면 이것은 나 밖에 못 하는 기술이며, 여기서 쭈구리가 되자면, 이 모든 예민을 나에게만 떤다는 거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니?
아이는 계단 한칸을 오르듯 안크는 듯 갑자기 큰다지만, 정말 갑자기 일어난 순하디 순한 나의 막내의 변화에 처음 며칠간은 배꼽 잡고 웃다가, 최근 이삼일 간은 정말 감정이 상해버렸다. “나후는 누구 강아지지?”하면 “야옹, 야옹”거리는 나의 사랑스러운 막내에게 말이다.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 누군가 쓴 짧은 글이 나에게 명언이었다. “육아한다고 하지 말라. 그냥 아이와 함께 사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상꼬맹이의 고집에 마음을 다치고, 상꼬맹이의 눈웃음에게 설레임을 느끼며 가족으로 산다. 너의 안락한 집, 나의 따뜻한 집, 우리의 평화로운 집에서.
사랑해. 내 강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