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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슬기 Sep 27. 2022

80억 개의 세계관

당신의 세계를 주세요, 저의 세계를 드릴게요.




지금도 누군가 고유한 당신의 세계를 떠올리고 있네요.






 오랫동안 다른 이의 세계관을 모았다. 반면에 나의 세계관을 누군가에게 드러내기 부끄러웠다. 그 정도로 내 세계관은 좁거나 작다. 다른 이들의 세계관이 큰 대야라고 한다면 나는 간종지 정도가 되겠다. 그래서 누군가의 잘하는 점, 멋있는 점, 사랑스러운 점에 영향을 받으려 한다.



 사진을 찍길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동혁이고, 동혁은 나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사물과 생명과 풍경을 그리고 삶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담아 보관하길 좋아한다. 동혁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들꽃이 이리도 예뻤는지, 지나간 세월에 내가 담지 못한 꽃은 어찌나 많았는지 깨닫게 된다. 이제라도 세월을 담고 싶어 동혁을 따라 사진을 찍는다. 그의 가르침에 나도 어느 정도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미술관에서 마주친 조각상 앞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렌즈를 확대한다. 흰색 면의 디테일을 섬세하게 담기 위해 밝은 영역도 낮춰본다. 그렇게 열심히 촬영에 집중하는 나를 찍어대는 동혁은 우스꽝스러운 나의 모습도 예술가처럼 멋들어지게 담아낸다. 한참을 찍다가 감탄을 연발하며 동혁에게 말한다.

 “헐, 나 이제 잘 찍는 듯. 고맙네.”

 그럼 동혁은 왠지 모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네가 잘 찍는 거지.”

 동혁의 가름침을 더불어 자랑하고 싶은 가름침은 많다. 특히 내 엄마의 가르침에는 세상을 게으르지 않고 꼼꼼하게 바라봐야 갖출 수 있는 특별한 전문성과 인내가 담겨있다.







 설거지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엄마는 가장 먼저 깨지기 쉬운 유리컵을 씻고 수저, 그릇, 접시를 씻는다. 기름때가 묻은 식기나 프라이팬은 맨 나중에 씻는다. 마무리는 물이나 거품 따위로 너저분해진 싱크대를 닦는 일이다. 그렇게 복잡한 설거지를 해내는 시간 또한 놀라울 만큼 빠르다. 번쩍번쩍한 싱크대의 태를 보고 있으면 나는 감히 따라잡을 수도 없는 엄마의 설거지 퀄리티에 압도된다.

 이따금씩 남의 집에서 설거지를 할 일이 종종 생기는데 그때마다 엄마를 떠올린다. 처음에는 수세미의 상태를 확인한다. 수세미 관리가 잘 되어 있을수록 적은 세제로 많은 양의 설거지를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씻은 접시와 수저는 식기 별로 정리한다. 식기를 재사용할 타인의 가족을 위해 기름이 남지 않도록 미온수를 쓴다. 마무리는 역시나 싱크대를 닦고 정돈하는 일이다.

 동혁과 엄마의 잘하는 점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타인의 잘하는 점을 닮길 좋아하는 동시에 타인의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낯선 세계를 경험하기도 좋아했다.



 여느 때와 같이 쇼핑몰 업무를 마친 뒤 글을 쓰고 사진을 편집하는 일 따위를 하고 있던 이른 저녁이었다. 퇴근이 따로 없는 프리랜서의 삶에 구원의 손길을 건네듯 휴대폰 진동소리가 나를 깨웠다.

 "여보세요? 준태야, 저녁에 드라이브 갈까."

 독서 그룹에서 알게 된 예림은 운전을 배우지 않았지만 차를 타길 좋아했다. 그는 드라이브를 가고 싶을 때 자주 나를 찾았다. 일중독의 내가 적당히 일을 마치고 드라이브를 가는 태도가 의아했다. 아마도 일에 시달려 놓치고 있던 바깥세상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도시에 들어선 네온사인과, 선선하게 스치는 밤바람과, 사람의 숨결과 같이 고요하게 다가오는 세상의 것들을 이따금씩 경험했다. 누군가의 세계관은 지친 나를 달래주기도 한다. 그 무렵이 되면 나는 낯선 세계관에 대해 관대해지거나 별 수 없다는 듯 느슨해진 내 세계관의 상태를 좋아하게 된다.

 이를테면 다른 이들의 세계가 내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아슬아슬함과 비슷했던 하루가 신선한 하루가 되는 짜릿함과 나와 타인의 개별적인 세계관이 섞여 또 하나의 세계관이 탄생하는 경이로움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직접 닿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계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영향을 받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내의 손을 움켜쥔 채 동네를 거닐던 낯선 할아버지의 세계관이 그랬고, 자신의 캘리그래피에 생과 세월을 담았던 교수님 광현의 세계관이 그랬으며, 고마운 분들 덕에 잘살고 있다며 꽃보다 사람을 아름답게 보는 작가 영지의 세계관이 그랬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지만 누구든 상관없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다니엘의 세계관도 그랬다.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들의 세계를 사랑하게 됐다.

 경험하거나 사랑해버린 세계는 내게 고스란히 스며들고 다른 이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 다른 이가 나의 아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좋아하는 이와 친구가 되면 서점에 갈 일이 많아지거나 술을 좋아하는 이와 자주 만나면 주점에 가게 되거나 잘 웃는 이와 만나면 웃을 일이 많아진다.

 우주는 세상이라는 넓은 무대를 주었고, 다양한 세계관을 경험하도록 사회적으로 타고난 인류를 준 것이 아닐까. 우리는 개인의 습관, 집단의 전통, 나라의 문화, 지구의 인류와 같이 수많은 세계관 속에서 함께 교감하며 살아간다. 나는 고유한 사람들의 세계를 많이 목격하고 사랑하고 싶다. 그들도 나의 세계를 담아 갈 수 있도록 많은 것을 경험할 뿐이다.

 결국에는 닮고 싶은 이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나는 그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게 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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