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풍경이 되어주는 일
이미 그대가 없는 세상이거나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꽃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짐을 지고 피어갔다. 여린 꽃잎이 담지 못할 계절을 만나 차디찬 새벽의 고독을 보냈다. 꽃은 흔들리는 바람에 고개를 떨궜고 안식 없는 세월을 만나 품어주는 이 없이 쓸쓸한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지지 않고 피어있던 꽃은 풍경이 되었고 오래가는 꽃으로 남아주어 그 꽃을 발견했다. 오래된 이름을 품은 꽃의 생을 한참 동안 보고 싶다.
나보다 한참 어렸지만 더 많이 산 것 같은 내 친구 은수가 말했다.
"뜻하지 않게 태어난 나는 불행이겠지."
때로는 나의 시선이 창피할 만큼 그의 시선은 깊었다. 사색이 많았던 은수는 모든 사물에 개인적인 존재를 부여했고, 그가 담았던 저마다의 세계가 깊었을 존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세상과 조금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애한테 장갑을 쥐여줄 만큼 타인의 갈라진 손등까지 헤아렸던 그가 자신의 태어남을 부정하니, 순간 세상이 크게 잘못된 것만 같았다. 쉬운 말이 나올까 봐 꺼내지 못하는 내 속을 아는 듯 은수가 이어 말했다.
“미안해, 나 괜찮아.”
어렵게 꺼냈을 그의 마음을 놓치기 싫어서 대답했다.
“내 믿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
내 삶의 바탕이 되어주고 작은 세상의 소중함을 알려준 그는 나의 귀중한 믿음과도 같았다. 이제는 내가 그런 은수의 믿음이 되어주고 싶었다.
은수의 시선은 때로 내게도 연동되어 그가 보는 세상이 내게도 전해졌다. 함께 길을 걷다 동물 병원 분양 케이지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마주쳤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 예뻐 넋을 잃은 나를 은은하게 바라보던 은수가 강아지에게 말을 건넸다.
“엄마가 보고 싶진 않아? 이렇게 예쁜 얘를 엄마가 봤으면 하루 종일 물고 뜯고 귀여워했을 텐데.”
그렇게 엄마를 기다릴지도 모르는 강아지들이 결국 엄마를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지 않는 엄마 대신 낯선 이의 품을 기다리는 강아지들의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아늑해 보이던 케이지가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 유리를 박박 긁어대는 호기심 많은 아이, 쑥쑥 크기 위해 잠에 빠진 아이, 살아온 세월이 짧음에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할 게 많은 아이까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들의 작은 세상에도 수많은 사정이 존재했고 모두 자신의 생을 열렬히 보내는 중이었다.
가장 예쁠 적이 지났다고 말하는 오래된 강아지는 낮은 가격에 입양이 되기도 한다. 자라난 아이도 엄마 품이라면 마냥 예뻤을 텐데. 강아지는 오래될수록 사람 눈에는 덜 예쁜가 보다.
문득 나도 낡아버리면 사랑해 줄 이가 있을까 생각했다. 이따금씩 길에서 마주치는 개와 주인이 서로에게 건네는 아낌없는 사랑을 보고 있으면 은수와 함께 만났던 케이지 속 강아지들이 떠오른다.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가려 줄 주인과 닿아 귀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기로 했다.
은수는 거리에서 만났던 낱낱이 이뤄진 잎사귀의 삶도 구체적으로 담아내려 했다. 자신의 곁에 다가온 풍경에게 보답하듯 그들에게도 풍경이 되어주려 했다. 그는 작은 새싹도 돋보이는 풍경으로 담아내는 사람이었고 그들이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과도 같다 말했다. 그 바람을 맞은 이가 자신이라서 기쁘다던 은수를 보다가 나를 비롯해 작은 세상들이 은수에게 불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은수는 2021년 겨울을 끝으로 나와 세상의 곁을 떠났다. 이제는 그의 풍경이 되어줄 수 없는 내가 그의 삶을 겪고 내게 불어오는 바람을 그냥 보내지 않게 되었다.
이는 내가 나와의 우정을 쌓는 일 다음으로 세상과 쌓는 우정이었다. 무엇보다 은수와의 우정을 지속하는 일이었다. 나를 이루는 세상이 멀어져 감을 느낄 때 내가 먼저 세상을 이루는 이가 되기도 했다. 행복을 잡기 싫거나 일부러 놓치는 게 아닌, 작은 행복에서 상처받을 이들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은수가 그랬을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그에겐 상처였을 테니까. 그가 내 곁에 있다면 세상의 행복을 설득하길 멈추고 그저 그의 영원한 풍경으로 남고 싶다. 내 몸과 마음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그와 보낸 시절에 사랑을 꾹꾹 눌러 담아 구체적인 기억으로 남을 것처럼.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나의 기억을 떠올려 줄 이가 있다면 다른 세상에서 길을 잃어도 든든할 것만 같았다. 은수가 든든하도록 그의 기억을 귀하게 간직할 것이다.
태어남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는 각자 다른 사정과 만나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사정이 어떤 이에겐 '짊어짐'이 될 것이고 어떤 이에겐 '계승'이 될 것이다. 다른 이의 비해 모자란 축복 속에서 태어난 꽃이 있었다. 그 꽃은 듬뿍 담아야 할 사랑 대신 고독과 어둠을 담고 자랐다. 그럼에도 밝은 색을 잃지 않았던 꽃은 내 삶에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는 가느다랬지만 예쁜 꽃을 피웠고 예쁜 꽃으로 졌다. 그렇게 꽃은 소중히 간직해 온 이름을 내게 계승했다. 그는 내 기억 속에 지지 않을 꽃으로 피었고 무엇보다 큰 풍경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