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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슬기 Nov 09. 2022

사라진 소리를 찿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비로소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번역하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다







 세상에는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들리지 않고 보이기만 하는 소리도 있고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소리도 있다. 그 소리를 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누구나가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고 살아간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듯 귀에 들리는 것을 듣는다고 모두 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말이 없는 어떤 이들의 침묵 속에도 각자 마음의 사정과 사연이 있듯이 세상에는 내가 목격한 삶보다 목격하지 못한 삶이 더 많았다. 들리지 않던 마음의 소리가 들릴 때 우리의 교감이 깊어졌고 그렇게 서로가 되어갔다.











 몇 년 전, 사랑했던 이의 아빠가 딸을 위해 호박을 보내왔다.

 “이 호박을 어쩌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오리의 작은 탄식에는 애틋한 아빠와 번거로운 호박의 소리가 담겨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어버린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리야, 그 호박 나 줘. 호박죽 만들어줄게.”

 호박 손질은커녕 타인이 만든 호박죽을 먹을 줄만 알았던 내가 허세를 부리고 말았다.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이가 서울살이에 애쓰는 딸에게 보낸 다정한 아빠의 소리를 더불어 성가신 선물에도 사랑을 느끼는 갸륵한 딸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주제넘게도 부녀의 따뜻한 소리에 내 소리를 더하고 싶어졌다.



 늘 오리가 차린 상을 맛보던 내가 오늘만큼은 그녀를 위한 상을 차려주고 싶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 부엌에 오지도 마. 완성하면 부를 거야.”

 일을 마치고 만난 시간은 오후 아홉 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간이었고, 고생했을 오리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분주해져야 했다. 다행히 머릿속에 그려지던 커다란 늙은 호박이 아닌 작고 예쁜 단호박이었다. 호박은 작지만 묵직했고 윤기가 났다. 그 태를 보고 있으니 흙 묻은 손과 구슬땀으로 돌봤던 이의 정성 어린 마음이 들렸다.

 ‘아버님, 기필코 따님에게 그 마음을 전해드릴게요.’

 나는 괜히 혼자서 중얼거렸다.



 미리 찾아 놨던 스마트폰 속 레시피와 호박을 번갈아 쳐다봤다. 씻은 호박을 반으로 가르니 벌써부터 호박 분야의 요리 장인이 된 것 같았다. 그 기세에 내가 위엄 있게 말했다.

 “껍질을 미리 벗겨내면 편하겠군. 나는 많이 똑똑할지도.”

 생각과 달리 호박은 만만하지 않았다. 속살을 드러내길 거부했던 단단한 껍질의 호박은 내 손아귀의 근육을 마비시켰다.   

 “으아아악 쥐 나겠다!”

 하는 수 없이 먼저 씨앗을 파냈고 찜기에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로 호박을 듬성듬성 잘랐다.

 남루했던 내 반지하 자취방의 주방은 작았다. 요리하기 빠듯한 좁은 싱크대는 손질이 꽤나 성가실 정도였지만 어떻게든 잘라낸 호박을 채반에 올려 찜기에 담았다.

  버너에 켜진 불을 확인하자 방 안쪽에서는 오리의 잠투정이 들려왔다.







 “준태야 어디 갔어!”

 그녀는 눕기 시작하면 금방 잠이 들었고 잠귀가 밝아 자주 깼다. 호박이 찌워질 동안 오리를 재우고, 마저 호박죽을 만들 심산으로 그녀의 곁에 누웠다.

 “나 여기 있어.”

 따뜻한 숨을 맞대고 오리의 꼭 감긴 눈을 지켜봤다. 눈코입을 천천히 바라보다 생각했다.

 '내 여친 예쁘네….'

 그러다 꿈속에서 엄마를 찾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고 그런 오리를 지켜보다가 괜스레 슬퍼졌다.

 오리야 너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너는 잠이 든 동안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가 봐. 너에게 누가 걱정을 끼친 거니. 그녀의 잠투정에서 들리는 엄마의 소리는 내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저 짐작할 수밖에 없는 가려진 사정에 슬퍼하는 내가 무례한 사람 같았다.



 이대로 오리의 품에 안겨 오늘을 마치고 싶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호박죽의 소리가 가득 맴돌았다. 차낸 이불을 여며주고 일어서려는 기척에 그녀가 말했다.

 “가지 마.”

 그게 싫지 않았던 내가 말했다.

 “불만 끄고 올게.”

 저녁으로 호박죽을 먹여주고 싶었지만 아침으로 미뤄야 했다. 출근 전에 먹이려면 적어도 그녀가 자는 동안에는 꼭 호박죽을 완성해야 했다.

 불을 끄고 돌아온 내 허리춤을 감쌌던 오리의 가는 팔을 따라 어깨를 마주 감쌌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고 조금 삐져나온 도톰한 아랫입술이 아름다워 입을 맞췄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다가 나를 의식하느라 드러내지 않았던 숨 쉬는 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왔다. 그녀가 잠에 든 걸 확인하고 마음으로 속삭였다.

 '널 위한 호박죽을 만들고 올게.'

 마침내 나는 다시 전장으로 나섰다.





 해가 밝았고 오리가 씻는 동안 호박죽을 작은 용기에 담아 뜨끈하게 데웠다.

 나름 근사한 빛깔의 호박죽을 한술 뜨며 동그랗게 뜬 눈의 오리가 말했다.

 “와, 파는 것 같이 맛있어!”

 그녀의 한마디에 담긴 소리는 길었던 내 밤의 막이 오르는 소리였고 식은 호박을 밤새 으깨며 터질 것 같이 쑤셨던 팔이 대견해지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긴밀해지는 둘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물질이 떨려 진동이 되고 진동은 공기를 타며 소리가 된다. 무언가의 떨림에 의해 각기 다른 소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마음의 떨림이 생각이 되고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의식이 내린 언행과 눈빛과 보이지 않는 모습 속에는 다양한 소리가 담겨있음을 알았다.

 내가 아는 소리부터 모르는 소리 또는 알고 싶은 소리와 알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세상은 다양한 소리를 계속해서 들려준다. 그렇게 가지각색의 선율을 하나둘씩 만나다 보면 특히나 오랜 기간 마음 속에 머무는 소리가 있다. 마치 오리와 보낸 밤의 소리가 아직까지 내게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어떤 이는 소리의 고향을 추적하고 해석하는 일에 타고난 사람처럼 타인의 마음을 귀중하고 조심스럽게 들어본다. 모서리까지 구석구석 들어 볼 순 없겠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어야 함을 아는 이들의 세계는 열이 오른 이마에 젖은 손수건을 얹어줄 수 있는 이의 따뜻한 마음만큼 뭉클했다.

 마주했던 소리에 세상의 모든 예쁘고 못난 것들이 차곡차곡 담겨 감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소리를 잊지 못했다. 나를 헷갈리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는 세상의 울림은, 적어도 모든 이의 우주가 아주 작은 떨림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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