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11]
당신은 점쟁이가 아닙니다. '고성능 스캐너'일뿐.
부제: 타인의 얼굴을 데이터로 읽느라 과부하 걸린 30대 남자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댄디한 정장 차림의 30대 남성 손님이 들어온다.
그는 들어오면서 소믈리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의자를 빼서 앉을 때도 소리가 나지 않게 배려한다. 행동 하나하나에 다정함이 배어있지만, 시선은 시종일관 테이블보의 무늬나 소믈리에의 넥타이 매듭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예의 바르고 섬세한 분이 오셨군요.
제게 물수건을 건네받을 때도 혹시나 손이 닿을까 조심하는 배려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손님, 왜 저를 보지 않으십니까? 제가 무섭게 생겼나요, 아니면 제 눈을 보면 돌로 변하는 저주라도 걸리셨나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사람을 싫어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신경 써서 탈이죠.
여자친구도 처음엔 제 다정함에 반했다가, 나중엔 화를 내더군요.
'왜 나랑 얘기할 때 내 눈을 안 봐? 내가 뭐 잘못했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사람 눈을 보면. 너무 많은 게 보여요.
그냥 눈동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관상'이 읽혀버린다고 할까요?
상대방이 웃고 있어도 눈가 주름의 각도를 보면 '아, 지금 억지로 웃는구나, 집에 가고 싶구나' 하는 게 보이고,
상사가 칭찬해도 동공의 흔들림을 보면 '이거 다 립서비스네, 뒤에 꿍꿍이가 있네' 하는 게 다 느껴져요.
마치 제 뇌가 스캔 기계가 된 것 같아요. 눈을 마주치는 순간 상대방의 감정, 컨디션, 숨겨진 의도까지 수 기가바이트의 데이터가 제 머릿속으로 강제 전송되는 기분입니다.
그게 너무 피곤하고 기가 빨려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돼요.
그냥 바닥을 보고 얘기하는 게 마음 편해요. 차라리 제가 소심한 놈 취급받는 게, 남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괴물이 되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의 시선이 머무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주의를 끈다.)
손님, 당신은 관상을 보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정적 과잉 공감자'일 뿐입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비자발적 안면 데이터 과부하 증후군]
(Involuntary Facial Data Overload Syndrome)입니다.
당신에게 '아이 콘택트'는 단순한 대화의 수단이 아닙니다. '정보의 홍수'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의 표정을 '그림'으로 보지만, 당신은 '텍스트'로 읽고 있습니다.
미세한 눈 떨림, 입꼬리의 경직, 호흡의 변화. 남들은 놓치는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을 본능적으로 캐치해서 해석하느라 당신의 CPU가 과열된 상태죠.
당신이 눈을 피하는 건 무례함이 아니라, 당신의 뇌를 식히기 위한 '생존 본능'이자 '방어 기제'입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도수 높은 위스키 같습니다. 향은 좋은데, 삼키면 식도가 타들어 가죠.
당신은 참 다정한 사람입니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상대의 거짓말을 모른 척해 주려고 눈을 피하는 거니까요.
다 안다는 듯이 쳐다보면 상대가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낄까 봐 배려하는 거죠?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눈을 맞추지 않는 친절은 '영혼 없는 서비스'로 오해받기 쉽습니다.
당신은 배려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이 사람이 나한테 벽을 치네', '나한테 숨기는 게 있나'라고 불안해합니다.
정보를 차단하려다, 관계까지 차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과부하를 막고, 관계의 오해를 풀기 위한 '필터링' 처방입니다.
눈을 보는 게 힘들다면, 눈을 보지 마십시오. 대신 상대의 미간이나 인중을 보십시오.
상대방으로서는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당신은 직접적인 '눈동자 데이터'를 수신하지 않아도 되죠.
해상도를 살짝 낮춰서 흐릿하게 보는 겁니다.
대화할 때 상상하십시오. 당신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상대의 감정 데이터가 나에게 들어오기 전에 렌즈에서 튕겨 나간다고 최면을 거십시오.
"저 사람의 표정은 저 사람의 것. 내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말씀하십시오.
"관상을 본다"라는 이상한 말 대신 이렇게요.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네 눈을 보면 네 감정이 나한테 너무 크게 들어와. 그래서 벅차서 가끔 눈을 피하는 거야."
이 한마디면, 당신의 회피는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부끄러움이 될 겁니다.
자, 이제 계산하고 나가실 때는 제 인중을 한번 보고 인사해 주시겠습니까?